[이 아침에] '엿장수 마음'은 예술에서나 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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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誤讀하는 주관적 해석 난무, 정치특히더해…'성찰적 정독' 필요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마더'에 대한 관객들의 해석이 다양하다. '마더' 자체가 해석의 여지가 많은 '열린' 텍스트여서 그럴 것이다.
어느 기사에 의하면 관객들은 짐승 같은 모성의 딜레마를 다룬 이 영화를 아들의 복수극으로도 해석한다. 동반 자살하려던 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들이 바보 노릇을 하며 엄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아들의 친구가 엄마와 내연의 관계라거나 아들과 배다른 형제라고 보는가 하면,단순한 소도구로 쓰인 일력(日歷)의 '10월15일'에서까지 상징과 암시를 읽으려고 한단다. 이에 대한 감독의 변은 '관객들이 너무 앞서 간다'는 것이다.
소설의 플롯 이론에는 이런 말이 있다. '처음에는 모든 게 가능(possible)하고,중간에는 모든 게 개연적(probable)이며,끝에는 모든 게 필연적(necessary)이어야 한다. '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는 소설의 처음에 못이 하나 등장한다면 끝에서는 주인공이 그 못에 목을 매단다고 말한다. 소설에서 이유 없이 그냥 등장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 해석 자체가 아니라 '과잉' 해석이 문제일 터이다. 주제를 풍부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잘못 파악하게 이끄는 해석은 그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
하지만 문학사는 '창조적 오독(誤讀)'을 통해 발전하기도 한다. 작가들은 언제나 선배 작가들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후배작가들은 선배작가들의 작품을 일부러 오독하거나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개척하려고 한다. 문학사를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삼촌에서 조카로' 이어지는 반역 행위로 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커튼'에서 강조한 바도 선(先)해석이 내려진 기존의 커튼을 찢어버려야만 진정으로 위대한 작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작의 영역에서는 이런 '창조적 오독'이 오히려 작가의 특권이자 개성이 된다.
그러나 창작이 아닌 현실에서의 '파괴적 오독'은 범죄와 다름없다. 유령의 언어인 소문의 경우가 그렇다. 백가흠의 단편소설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에서는 아무런 가능성이나 개연성,필연성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자가 증식하는 소문의 폭력성이 여실히 강조되고 있다. 며느리가 없어졌다면 시아버지와 바람이 나서 그렇다는 식이다. 이런 헛소문은 시아버지의 자살을 부르고,남북 이데올로기를 고착화시킨다.
모든 해석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고,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도 있다. 특히 사람들은 상황이 힘들어서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사리 분별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마치 영화나 소설 텍스트를 해석할 때처럼 삐딱하게 본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착각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과장한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을 오독하기 쉽다. 그 결과 거짓말을 일삼는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해서 그 거짓말에 복수당하고 만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일인칭' 중심의 주관적 해석만이 난무하는 듯하다. 정치인들이 더 심각하다. 서로가 자신의 해석만 앞세운다. 나만 너무 힘들고 나만 옳다. 그러니 타인이 적이고 상대방은 그르다. 사실(fact)을 제시해도 허구(fiction)라고 생각한다. '엿장수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혼란스럽고 위험하다. 오독이 용서되는 것은 정치가 아닌 예술 분야이다. 정치는 영화나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가 신념일 수는 있어도 맹신일 수는 없다. 또한 정치는 진담이어야지 소문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창조적 오독'이 아니라 '성찰적 정독'이 아닐까.
김미현 문학평론가.이화여대 교수
어느 기사에 의하면 관객들은 짐승 같은 모성의 딜레마를 다룬 이 영화를 아들의 복수극으로도 해석한다. 동반 자살하려던 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들이 바보 노릇을 하며 엄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아들의 친구가 엄마와 내연의 관계라거나 아들과 배다른 형제라고 보는가 하면,단순한 소도구로 쓰인 일력(日歷)의 '10월15일'에서까지 상징과 암시를 읽으려고 한단다. 이에 대한 감독의 변은 '관객들이 너무 앞서 간다'는 것이다.
소설의 플롯 이론에는 이런 말이 있다. '처음에는 모든 게 가능(possible)하고,중간에는 모든 게 개연적(probable)이며,끝에는 모든 게 필연적(necessary)이어야 한다. '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는 소설의 처음에 못이 하나 등장한다면 끝에서는 주인공이 그 못에 목을 매단다고 말한다. 소설에서 이유 없이 그냥 등장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 해석 자체가 아니라 '과잉' 해석이 문제일 터이다. 주제를 풍부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잘못 파악하게 이끄는 해석은 그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
하지만 문학사는 '창조적 오독(誤讀)'을 통해 발전하기도 한다. 작가들은 언제나 선배 작가들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후배작가들은 선배작가들의 작품을 일부러 오독하거나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개척하려고 한다. 문학사를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삼촌에서 조카로' 이어지는 반역 행위로 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커튼'에서 강조한 바도 선(先)해석이 내려진 기존의 커튼을 찢어버려야만 진정으로 위대한 작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작의 영역에서는 이런 '창조적 오독'이 오히려 작가의 특권이자 개성이 된다.
그러나 창작이 아닌 현실에서의 '파괴적 오독'은 범죄와 다름없다. 유령의 언어인 소문의 경우가 그렇다. 백가흠의 단편소설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에서는 아무런 가능성이나 개연성,필연성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자가 증식하는 소문의 폭력성이 여실히 강조되고 있다. 며느리가 없어졌다면 시아버지와 바람이 나서 그렇다는 식이다. 이런 헛소문은 시아버지의 자살을 부르고,남북 이데올로기를 고착화시킨다.
모든 해석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고,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도 있다. 특히 사람들은 상황이 힘들어서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 사리 분별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마치 영화나 소설 텍스트를 해석할 때처럼 삐딱하게 본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착각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과장한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을 오독하기 쉽다. 그 결과 거짓말을 일삼는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해서 그 거짓말에 복수당하고 만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일인칭' 중심의 주관적 해석만이 난무하는 듯하다. 정치인들이 더 심각하다. 서로가 자신의 해석만 앞세운다. 나만 너무 힘들고 나만 옳다. 그러니 타인이 적이고 상대방은 그르다. 사실(fact)을 제시해도 허구(fiction)라고 생각한다. '엿장수 마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혼란스럽고 위험하다. 오독이 용서되는 것은 정치가 아닌 예술 분야이다. 정치는 영화나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가 신념일 수는 있어도 맹신일 수는 없다. 또한 정치는 진담이어야지 소문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창조적 오독'이 아니라 '성찰적 정독'이 아닐까.
김미현 문학평론가.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