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요부로 알려진 어을우동은 오랫동안 명맥이 끊길 뻔한 한국 문신문화의 맥을 이은 인물이었다?

한국 사회에선 오랫동안 문신은 터부시되는 행위였다. 간단히 말해 몇 십년 전만 해도 ‘조폭’이나 하는 ‘짓’이었던 것, 문신을 하는 것은 곱지 않은 사회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결단을 요구하는 행위였다. 특히 병역의무를 면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사람사이에 회자되긴 했지만 실행에 옮긴 경우는 극히 드물었던 그런 ‘이단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한국에선 과연 예전부터 문신의 문화가 없었던 것일까.

한국의 고대사회에 문신문화가 있었음을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가 전한다고 한다. 특히 중국의 고대사서들이 전하는 왜인들의 습속에 문신에 대한 언급이 많은 만큼 문화적 연관성에 대한 관심도 높다는 것.

우선 삼국지 동이전 한(韓)조에 “남자들은 때때로 몸뚱이에 바늘로 먹물을 넣어 글씨나 그림을 그린다, 이것을 문신이라고 한다”는 언급이 나온다는 것. 같은 책 변한조에도 “남자나 여자가 모두 왜와 같이 바늘로 몸뚱이에 먹물을 넣어 글씨나 그림을 그린다”고 전하고 있다.

후한서 한(韓)조에도 “그 남쪽 국경은 왜와 가까운 까닭에 왜의 풍속을 닮아 역시 몸뚱이에 먹물을 넣어 그림을 그리는 자가 있다”는 언급이 있는 것.

중국 사서에 전하는 많지 않은 한국의 문신에 대한 언급을 정리해보면 변한이나 한(삼한)에 문신의 습속이 있는데 남녀가 모두 문신을 했고 몸에 그림이나 글씨를 넣는 방식의 문신이었다는 것.

앞서 삼국지 등 중국 사료들은 “남자는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넣고 몸뚱이에 글자나 그림을 만든다. 이 문신의 위치와 대소를 가지고 사람의 높고 낮은 것을 구별한다”며 일본의 문신습속을 자세하게 전한다.

단편적 사료들, 특히 후한서 기사 중 한국의 문신에 대한 내용은 앞의 삼국지 기사를 그대로 베낀 듯 한 인상이 강한 가운데 이들 자료들이 분명하게 전하는 것은 우리에게 문신의 습속이 적어도 일부나마 있었다는 것이다.

굳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삼한시대 북부에선 문신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을 고려할 때 고조선이나 동예, 혹은 옥저 등에선 문신의 습속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남부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문신의 습속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것.

특히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에 삼국시대 관련 기록에선 문신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힘든 점을 고려해보면 문신의 습속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풍속에 단발문신이 있었는데 일찍이 기자의 교화로 그런풍속이 없어졌다”며 고려시대에는 이미 문신의 풍속이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일언반구 찾아볼 수 없었던 문신에 대한 언급은 고려사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번의 경우엔 문신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형벌의 일종으로 소개되고 있긴 하지만.

고려사 권85 형법지 도적조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고 한다.

“도둑질을 하여 유배한 곳에서 도망한 자는 얼굴에 글자를 새기고 형기가 끝난 뒤에 먼땅의 주현으로 유배한다.”

즉 유배자가 도주했을 경우, 가중처벌의 수단으로 문신이 등장하는 것. 이는 송나라의 송회요나 경원조류법 등에 나오는 경면,자면 등 문신형을 수용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한다.

이같은 문신형의 처벌은 조선시대 경국대전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즉 “사형에 처하지 않은 강도는 법조문대로 처결한 뒤 몸에 강도라는 두 글자를 먹물로 새겨 넣으며 두 번 범하면 교형에 처한다”라고 전하고 있는 것.

실제 문신형의 사례도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6년 기사중 “오철이 의주에서 소를 훔치다 잡혀 귀를 베였고 다음에 의복과 말을 훔쳐 도망했으나 추적에 의해 잡혀 얼굴에 자자(刺字)를 당했다”라는 상습범에 대한 가중처벌의 케이스를 상세히 전하고 있는 것.
몸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효의 시작으로 여겼던 조선시대에 일종의 저주이자 천형인 중형이었던 문신형의 존재는 이후 한국사회에서 문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뿌리내리게 한 근원적 이유였다. 즉 불효자에 사악한 범죄자의 표상이 문신에 덧씌워진 것이다.

하지만 문신의 습속이 민간에선 은밀이 이어졌을 가능성을 전하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1년조에는 “어을우동이라는 여자가 정이 두터운 남자들의 팔뚝이나 등에 문신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고 한다. 간통행위로 교수형을 당한 어을우동의 행적에서 남녀간 정을 확인하기 위한 문신이 조선시대에도 은밀히 시행되고 있었다는 게 문신 전문가 조현설 박사의 설명이다.

일종의 인류문화 보편현상이라는 문신.한국에서도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정도차이는 있지만 문신이 존재해왔다.

오늘날 문신을 비교적 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 한국사 최초의 문신 르네상스는 아닌 것이다. 한국 사회 역시 과거부터 계속해서 문신 무풍지대는 아니였던 것이다. 물론 그런 사실을 인지한다고 해서, 목욕탕에서 문신을 심하게 하신 분을 만나면 조용히 자리를 비켜드리는 심리는 변함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참고한 책>

조현설, 문신의 역사, 살림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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