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개인들이 협력과 경쟁을 통해 만드는 집단지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이제 새로운 사이버 시공간에선 '우리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로 바뀌고,다시 '우리는 공유한다,고로 창조한다'로 진화한다. 웹 2.0이니 3.0이니 클라우드컴퓨팅이니 하는 것들은 이처럼 계속 버전을 높여 진화하는 집단지성의 엔진들을 나타내는 키워드들이다.

미디어와 광고,소프트웨어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영화,TV 등 창조적인 문화부문에서는 이미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집단지성의 물결이 어디까지 확산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특히 웹이 현대정치에,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크게 엇갈린다. 웹이 정보와 권력을,직업 정치인이나 정당 또는 정책 관료 등 엘리트의 손에서 과거 관객 노릇만 하던 사람들 손으로 옮겨 줌으로써 껍데기만 남은 정당정치를 소생시킬 것이라고 보는 낙관론자들도 있지만,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회의론이 더 우세한 것 같다. 대중은 과연 지혜로운가,그들의 선택은 언제나 옳고 신뢰할 만한가.

특히 광우병공포와 촛불의 기억은 집단지성보다는 집단감성과 패닉이 더 현실적이라 증언한다. 사실 광장은 종종 독재권력의 압제에 대항하는 민주의 상징으로 통했지만 민주주의만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이나 선동과 독선이 득세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이 웹과 광장은 선량한 자들만의 공간도 아니다. 최근 부정선거시비로 유혈사태를 빚으며 위기에 빠진 이란에서 단문장 블로그 형태의 소셜미디어인 '트위터'가 반정부 시위 확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별반 새로울 것도 없지만 회의론은 지난해 촛불정국을 거치며 새로운 힘을 얻었다. 촛불은 웹을 통해 웹을 뛰어 넘어 현실의 광장을 뒤덮었고 다시 웹을 통해 증폭돼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촛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항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정부는 집단지성을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단지성 현상을 외면하고 백안시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큰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많다. 금지나 진압의 사고는 오히려 집단지성을 활성화시키고 확산시킨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많은 원성을 샀는지는 이후 전국으로 번진 교수 · 교사 · 종교인사들의 시국선언 퍼레이드만 보아도 쉽게 드러난다.

물론 민주적 선거를 통해 뽑힌 대통령을 뽑자마자 이런 저런 정책들을 둘러싼 민의를 내세워 흔들어대는 이 기막힌 현상은 대의민주주의 교범엔 없는 역설이다. 집단지성은 원래가 대표성이 없다. 행동에 책임을 지지도 않고 책임을 추궁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그러나 이 치명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집단지성은 이미 불가역의 사회현상으로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면할 수 없다. 언젠가 새로운 시대의 민주주의 교리로 공인을 받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집단지성의 자기파멸적 귀결을 막는 것이다. 그러려면 사회 공동의 문제를 참여와 협업,공유를 통해 함께 해결하는 집단지성의 선순환구조가 '자연선택'되도록 정치생태계를 바꿔나가야 한다. 정치와 정책과정의 안팎을 개방적 협업의 구조로 재설계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이명박 정부야말로 '열린 정부',협업 · 개방의 정부로 정치철학을 전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명박 대통령이 방미 중 소통을 위해 '트위터(twitter.com)'에 가입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은 고무적이다. 물론 트위터식 단문소통만으로 한국의 복잡한 정치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제스처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출발은 좋다. 누가 아는가. 그렇게 자발적 · 선제적으로 대중들과 만나고 함께한다면 그 골치 아픈 소통 문제도 술술 풀릴지.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