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경험할 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로 마음의 상처를 돌본다. 하지만 진정으로 실패의 쓴잔을 성공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패의 악몽이 잔혹하리만치 큰 탓이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젊은 날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달려온 김동녕 한세YES24홀딩스 회장(64)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나지막한 목소리를 가진 김 회장은 또박또박한 서울말투를 썼다. 만난 장소가 사무실이 아니었다면 '교수님'이라고 불렀을 만큼 천천히,하지만 조리있게 말했다.

#청년 김동녕의 아픈 실패

김 회장은 경기고(60회)와 서울대 경제학과(64학번)를 졸업했다. '제일 잘 하는 것이 공부'였던지라 학업을 마치고 197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 입학해 MBA를 땄다.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공부를 끝내고 돌아와 28세에 차린 것이 한세통상.지인 4명을 끌어모아 옷공장을 차렸다.

하지만 회사는 오일쇼크로 인해 7년 만에 쓰러졌다. 기름값이 뛰자 실값이 갑자기 오른 탓이었다. 김 회장의 말을 빌면 3~6개월씩 장기로 계약하는 것이 상례라 '밑지면서도 꾸역꾸역 옷을 만들어' 거래선에 댔다. 그는 "원자재값이 너무 올라가면 포기할 줄도 알았어야 했는데 미련했다"고 회고했다.

실패가 남긴 아픔은 컸다. 집안 어른들이 '너는 사업엔 재능이 없는 것 같으니 공부를 하라'며 사업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인생의 고비였다. 그로부터 3년을 절치부심하며 보냈다. 그가 다시 일어선 것은 1982년.한세실업을 차렸다. 의류사업에 재도전했지만 마음가짐은 달랐다. '은행에 가지 않는다'는 원칙도 세웠다. 돈은 은행에서 꿔주는 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벌어서 충당하자는 다짐이었다. "영업을 열심히 해서 회사를 키우고,자금은 섬세하게 운용하는 것이 득"이라는 김 회장의 경영 원칙은 이때 세워졌다.

#한 걸음부터 천천히

한세실업의 성장은 눈부셨다. 그가 세운 목표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수출을 매년 20%씩 늘리는 것.뛰어난 영어 실력을 토대로 직접 영업에 나섰다. 리바이스 나이키와 같은 유명 브랜드들이 죄다 그에게 옷을 맡기기 시작하면서 회사가 점차 튼실해졌다.

2000년 이후 김 회장은 인수합병(M&A)에 눈을 돌렸다. 외환위기 여파로 법정관리로 넘어가는 회사들이 많던 때였다. 그가 처음 관심을 가진 곳은 쌍방울.2년여의 시간을 쫓아다니며 M&A를 공부했지만 쌍방울은 그의 손 안에 넘어오지 않았다. 두 번째 실패였다.

2003년 5월 YES24의 대주주가 경영권을 내놓으면서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회사를 사들이기도 전에 "어떻게 경영하지?"란 두려움이 앞섰다. 낯선 일에 대한 막연한 공포였다. 그때 처조카이자 인터넷서점 알라딘을 경영하던 조유식 사장이 "고모부가 경영하면 금방 흑자가 날 것"이라며 힘을 실어줬다.

김 회장은 YES24에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혼자 출근해 일을 보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한세실업 사람을 한 명도 대동하지 않고 나타난 회장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직원들에게 "무조건 돈을 벌자.그래야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부실한 사업은 나눠 팔았다. 당시 YES24가 준비하던 방송사업이 첫 대상이었다. 김 회장은 경쟁적으로 책값 할인을 했던 과거 경영진의 방식도 버렸다. 그는 "왜 죽기살기로 경쟁업체와 칼들고 싸우나. 오늘이 있어야 내일이 있다. 당장 오늘 이익을 낼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며 임직원들을 설득했다.

#운동장 뛰는 회장님

'한 걸음 더 늦게 가자'는 그의 소신은 1년 만에 효과를 봤다. YES24가 흑자로 돌아선 것.임직원 수는 2003년보다 늘지 않았지만 매출은 세 배 가까이 불었다. 지난해 말 기준 YES24의 매출은 2996억원,영업이익은 103억원에 달했다.

한세실업도 튼튼한 사업구조를 지닌 것은 마찬가지다. 2000년 이후 공장을 베트남 중국 니카라과 사이판 등으로 넓혔다. 그의 옷이 팔리는 주 무대는 미국이다. 1초마다 한세실업 옷 5벌이 팔린다. 불황이 시작된 지난해에도 한세실업은 6637억원의 매출에 735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그는 호랑이 회장님이기도 하다. 개인의 실적보다는 팀워크를 중요시해 실적이 나쁜 팀을 골라 1주일에 걸쳐 운동장 뜀박질을 시킨다. 때로는 그도 함께 뛴다. "다 같이 노력해야 되는 것이 회사"이기 때문이란다.

#짙게 밴 책 냄새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책 이야기다. 다 읽은 책은 반드시 집무실로 가져와 쌓아놓는다. 벌써 15년째 이어진 습관이다. 연도별로 읽은 책을 모아 놓고 틈틈이 들여다본다. 인터넷 서점을 경영하는지라 책은 수월하게 구해 볼 수 있다.

'요즘 무슨 책을 읽으시냐'고 물었더니 책 이름이 줄줄이 쏟아져나온다. 개그우먼 조혜련씨가 쓴 '박살 일본어',소설가 박완서씨의 '세가지 소원',인기그룹 빅뱅이 쓴 '세상을 향해 너를 소리쳐' 등등.소설 역사서 경제학서를 가리지 않고 좋은 책은 죄다 읽는단다.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모두 정독한 책만을 '읽은 책'으로 친다. 이렇게 김 회장이 읽는 책은 매년 20여권에 달한다.

김 회장이 요즘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전자책으로 불리는 e북이다. e북 시장 기반을 넓혀놓는 것이 그의 목표다. 왜 e북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며 우리 젊은 독자들이 좋아할 때 외국에서도 박민규,공지영의 책을 읽으며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소걸음(牛步) 걷듯 찬찬히 길을 걸어온 그에게 후배들에게 남길 조언을 청했다. 그는 "실패를 경험해야 성공도 있을 수 있다"며 "조급증에 시달리지 말고 천천히 가라"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