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심장마비 사망] 전설이 된 '팝 아이콘'…문워크로 '보는 음악' 시대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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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때 '잭슨 파이브'로 데뷔
그래미賞 13차례 받아
성추행 혐의ㆍ불행한 결혼
WSJ "빚만 5억달러"
그래미賞 13차례 받아
성추행 혐의ㆍ불행한 결혼
WSJ "빚만 5억달러"
'팝 아이콘' 마이클 잭슨은 그의 노래처럼 '세계를 치유하길(Heal the World)' 바랐지만 끝내 자신의 삶도 지켜내지 못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는 잭슨의 죽음을 애도하며 "잭슨의 삶은 판타지와 비극으로 점철됐다"고 평가했다. 잭슨을 스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음반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내 동생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마이클과 함께 내 정신의 일부도 날아가 버렸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팝의 황제' 오른 최초의 흑인
마이클 잭슨은 비틀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대중 음악가였다. 1958년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아홉 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난 마이클 잭슨은 여섯 살이던 1964년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를 결성,처음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1972년 첫 솔로 앨범 '오프 더 월'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잭슨은 1982년에 내놓은 '스릴러'가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하면서 '팝의 황제'에 등극했다. 특히 다음 해 NBC방송에서 '빌리 진'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미끄러지듯 휘저은 '문워크' 댄스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지금까지 10개의 음반이 총 7억5000만장가량 판매돼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매한 '빅3'로 꼽힌다. 그래미상도 13차례나 받았다.
마이클 잭슨이 팝 가수로서 유일하게 '황제'란 수식어를 얻은 이유는 그가 대중음악계 변화에 미친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은 작사와 작곡,노래와 안무를 모두 직접 소화할 수 있는 최고의 싱어송 라이터로 평가받는다.
마이클 잭슨은 뮤직비디오를 통해 1980년대 초반 '듣는 음악' 중심의 '라디오 스타' 대신 '보는 음악' 중심의 '비디오 스타' 시대를 열었다. 특히 뮤직비디오의 고전으로 꼽히는 '스릴러'는 1982년 당시 최초로 장편영화 제작용 35㎜ 필름으로 만들어졌다. 마이클 잭슨의 독특한 안무와 무대 퍼포먼스도 공연 방식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문워크'와 '브레이크 댄스' '팝핀' 등 현재 댄스가수 안무의 기본이 되는 다양한 춤들을 최초로 선보였다. 흑인 팝 음악을 전 세계 대중음악의 주류로 끌어올린 것도 그의 공이다. 백인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만을 틀었던 미국 24시간 음악전문 방송 MTV가 최초로 방영했던 흑인 가수 뮤직비디오가 바로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이었다. ◆불운했던 사생활
최고의 대중음악가로 명성을 쌓았지만 사생활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피터팬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잭슨은 개인 테마파크인 '네버랜드'를 짓고 어린이들을 초청해 동심을 즐겼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993년 11세 소년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이들 부모와 2330만달러에 합의했으나 이 사건으로 이미지에 큰 상처를 받았다. 2003년 또 한번 아동 성추행 사건에 휘말렸다. 또 그의 얼굴은 색소 이상으로 인한 반백증 때문인지 혹은 표백수술 때문인지 하얗게 변해갔고 반복되는 성형수술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할 만큼 이상하게 바뀌었다.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 못했다. 36세이던 1994년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다.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의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한 계약 결혼이었다는 등의 루머에 휩쓸리며 19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같은 해 잭슨은 간호사 데비 로우와 두 번째 결혼, 프린스 마이클 1세와 패리스 마이클의 아버지가 됐지만 1999년 '성격차이'를 이유로 이혼했다. 또 2002년엔 대리모를 통해 낳은 셋째 아들 프린스 마이클 2세를 자신의 집 밖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을 향해 창문 밖으로 흔들어 또 한번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전 세계에 7억5000만장의 앨범을 팔며 큰 돈을 벌어들인 잭슨이지만 '네버랜드' 운영비와 사치스러운 소비습관 때문에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잭슨이 5억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노래와 ATV뮤직퍼블리싱이란 회사를 통해 보유하고 있는 비틀스 노래의 저작권 가치가 10억달러에 달한다는 평가도 있다. 잭슨은 다음달 13일 영국 런던의 O2 아레나에서 컴백 콘서트를 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콘서트는 무산돼 버렸다. WSJ는 그의 재산을 둘러싼 새로운 드라마가 펼쳐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미아/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
◆'팝의 황제' 오른 최초의 흑인
마이클 잭슨은 비틀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대중 음악가였다. 1958년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아홉 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난 마이클 잭슨은 여섯 살이던 1964년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를 결성,처음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1972년 첫 솔로 앨범 '오프 더 월'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잭슨은 1982년에 내놓은 '스릴러'가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하면서 '팝의 황제'에 등극했다. 특히 다음 해 NBC방송에서 '빌리 진'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미끄러지듯 휘저은 '문워크' 댄스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지금까지 10개의 음반이 총 7억5000만장가량 판매돼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매한 '빅3'로 꼽힌다. 그래미상도 13차례나 받았다.
마이클 잭슨이 팝 가수로서 유일하게 '황제'란 수식어를 얻은 이유는 그가 대중음악계 변화에 미친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은 작사와 작곡,노래와 안무를 모두 직접 소화할 수 있는 최고의 싱어송 라이터로 평가받는다.
마이클 잭슨은 뮤직비디오를 통해 1980년대 초반 '듣는 음악' 중심의 '라디오 스타' 대신 '보는 음악' 중심의 '비디오 스타' 시대를 열었다. 특히 뮤직비디오의 고전으로 꼽히는 '스릴러'는 1982년 당시 최초로 장편영화 제작용 35㎜ 필름으로 만들어졌다. 마이클 잭슨의 독특한 안무와 무대 퍼포먼스도 공연 방식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문워크'와 '브레이크 댄스' '팝핀' 등 현재 댄스가수 안무의 기본이 되는 다양한 춤들을 최초로 선보였다. 흑인 팝 음악을 전 세계 대중음악의 주류로 끌어올린 것도 그의 공이다. 백인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만을 틀었던 미국 24시간 음악전문 방송 MTV가 최초로 방영했던 흑인 가수 뮤직비디오가 바로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이었다. ◆불운했던 사생활
최고의 대중음악가로 명성을 쌓았지만 사생활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피터팬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잭슨은 개인 테마파크인 '네버랜드'를 짓고 어린이들을 초청해 동심을 즐겼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993년 11세 소년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이들 부모와 2330만달러에 합의했으나 이 사건으로 이미지에 큰 상처를 받았다. 2003년 또 한번 아동 성추행 사건에 휘말렸다. 또 그의 얼굴은 색소 이상으로 인한 반백증 때문인지 혹은 표백수술 때문인지 하얗게 변해갔고 반복되는 성형수술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할 만큼 이상하게 바뀌었다.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 못했다. 36세이던 1994년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다.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의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한 계약 결혼이었다는 등의 루머에 휩쓸리며 19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같은 해 잭슨은 간호사 데비 로우와 두 번째 결혼, 프린스 마이클 1세와 패리스 마이클의 아버지가 됐지만 1999년 '성격차이'를 이유로 이혼했다. 또 2002년엔 대리모를 통해 낳은 셋째 아들 프린스 마이클 2세를 자신의 집 밖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을 향해 창문 밖으로 흔들어 또 한번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전 세계에 7억5000만장의 앨범을 팔며 큰 돈을 벌어들인 잭슨이지만 '네버랜드' 운영비와 사치스러운 소비습관 때문에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잭슨이 5억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노래와 ATV뮤직퍼블리싱이란 회사를 통해 보유하고 있는 비틀스 노래의 저작권 가치가 10억달러에 달한다는 평가도 있다. 잭슨은 다음달 13일 영국 런던의 O2 아레나에서 컴백 콘서트를 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콘서트는 무산돼 버렸다. WSJ는 그의 재산을 둘러싼 새로운 드라마가 펼쳐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미아/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