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안치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주는 위안과 기쁨은 그 무엇에도 비하기 어렵다. 그림 속 사람도 다르지 않다. 인물화는 말할 것도 없고 풍경이나 정물을 주소재로 다룬 그림이라도 사람이 들어 있으면 일단 좀더 가까이 다가서서 보게 된다.
생김새와 표정은 어떤지,뭘 생각하는 건지,어디를 응시하는지 궁금한 까닭이다. 다소 추상적이더라도 인물의 눈빛이 슬프면 따라서 슬퍼지고,그가 지닌 분위기가 안온하면 덩달아 편안해진다. 뭉크의 '절규'를 대하면 귀를 막고 싶고,클림트의'키스'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람은 이렇게 그림을 통해서조차 이야기를 걸고 감정을 전이시킨다. 페르난도 보테로(77)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보테로는 뚱뚱한 인물 그림과 조각으로 유명한 콜롬비아 출신의 거장.독학으로 20세기 서구 미술사조와 상관없는 독자적 양식을 구축,1957년 미국에 진출했고 92년 파리 샹젤리제에서 가진 야외 조각전으로 세계 무대에 우뚝 섰다.
국내엔 96년 경주 선재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경주 힐튼호텔 로비에 걸려 있던 그림과 조각은 당시 출품작 중 하나. 그의 손이 닿으면 누구나 터질 듯 풍만한 육체의 소유자로 거듭난다. 모나리자도 그렇고,신부와 장군,투우사와 곡예사도 마찬가지다.
그의 그림은 어렵거나 모호하지 않다. 국내 전시회(9월17일까지 덕수궁미술관) 출품작 또한 뭘 그린 건지 몰라 끙끙댈 일 없다. 그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집 좋은 사람을 보면서 미소도 짓고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습속은 어떤지 짐작하면 그만이다.
행복은 자잘하고 속물적인 것이다. 날씬함을 넘어 앙상함이 미덕인 세상에서 뚱뚱함을 뽐내는 듯한 보테로의 인물들은 얼짱 몸짱에 치여 주눅들었던 가슴을 확 펴준다. 뿐이랴.강렬하면서도 세련된 색상,꼼꼼한 붓질,화면 가득한 양감은 변두리 국가 출신으로 세계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의 힘과 의지를 전달, 삶의 무게에 짓눌렸던 몸과 마음에 묘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