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쌍하고 불행한 적이 있다면 그건,나도 가끔은 뻔히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것과 타협하고 싶어질 때야."

소설가 공지영씨(46)의 신작 장편소설 《도가니》(창비)에 나오는 인권운동가 서유진의 말처럼 사람들에게는 일신의 안녕을 위해 불의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비겁한 습성이 있다. 《도가니》의 주인공 강인호도 예외는 아니다. 한때 민주화의 메카였으나 이제는 퇴락한 도시 무진의 청각장애인학교 자애학원에 기간제 교사로 온 강인호는 교내에서 폭력의 냄새를 맡는다. 교장과 행정실장,교사는 청각장애 아동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했다. 아이들은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무진은 모두 한통속이었다. 경찰,교육청,시청 그리고 교회까지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사법부도 한 몫 했다. 발톱 없이 태어난 사자,다리 없이 태어난 사슴,귀먹어 태어난 토끼같이 연약한 소년소녀들을 유린한 자들은 "원래 농아들은 음탕하다"고 변명했다. '원칙,도덕,양심의 소리 같은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쓰레기통에서 분리 수거된' 상황 앞에서 소시민 강인호는 사제나 수도승처럼 불의에 항거하는 투사가 된다.

하지만 강인호의 과거 행적은 한점 티끌없이 순결하지 못해 탈탈 털어보니 먼지가 났다. 노골적인 협잡에 응하기에는 도덕선생처럼 까탈스러웠지만 투사로 버티기에는 약했던,어중간한 그는 결국 도망쳐버린다.

공씨는 강인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정의의 철퇴로 후려치는 대신 끌어안는 결론을 내렸다. 공씨는 "1980년대에 제가 썼던 소설과는 달리 배반한 강인호를 서유진이 감싸안는 설정을 한 이유는 제가 세상보는 눈이 바뀌었기 때문이고 예전 저항소설과는 다른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 뒤져보면 청문회에 나가기 창피한 인간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약점이 비리를 고발하는데 결격사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

그는 "이상은 실행하기 어렵지만,그 꿈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자체만으로 희망"이라면서 "강인호같은 사람들도 역사를 만드는 데 동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도가니》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광주에 10번 정도 내려가 관계자들을 만나고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던 포항에도 다녀왔다는 공씨는 "소설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훨씬 더 많은 참혹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몇몇 피해자는 만날 수도 없을 만큼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반면 특수교육학까지 전공한 가해자들은 '원래 문란한 아이들이라 꼬리를 쳐서…'라고 변명하는 걸 보고 '우리 사회가 후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는 "침묵의 카르텔이 공고하긴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씨는 소설 속 폭력의 원인을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한 다음 아무런 감시가 없을 때 기필코 폭력은 일어나는 법"이라고 짚었다. 그는 "이제는 화염병을 제조하는 1980년대식 저항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를 알고 있고 주시하는 데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