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근의 史史로운 이야기] 상앙의 법치, 제갈량의 법치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중국에서 법치주의의 강렬한 원형을 보여준 인물은 상앙(商革央, 기원전 ?~338년)이다. 그는 전국시대 진(秦) 효공의 신임을 얻어 철저한 법치개혁(變法)을 선보였다. 그가 어려서부터 공부했다는 형명지학(刑名之學)은 법가의 학문을 말하지만, 요샛말로 하면 형벌 위주의 통치술이다.
그는 일상의 세세한 구석까지 모든 것이 법으로 규율되는 시스템을 꿈꿨으며, 이를 위해서는 절대적인 준법이 전제돼야 했다.
"도성 남문에 긴 나무를 세워두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金)을 준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백성들이 모두 머뭇거리자 다시 50금을 준다고 약속했다. 한 사람이 이를 옮기자 즉시 그 돈을 주었다. " <사기 상군열전>
상앙의 법치는 형식적인 법과 기계적 운용으로 요약된다. 엄벌주의와 연좌제를 통한 효율적인 동원 덕분에 진은 10년 만에 부국강병을 이뤘다. 그러나 백성을 국가발전을 위한 도구로만 취급하는 각박한 정치로 인해 그는 모든 원망의 표적이 됐다.
권력의 원천이었던 효공이 죽자마자 그는 모반죄로 몰려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그는 체포를 피해 달아날 때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여관에서 쫓겨나자 이렇게 탄식했다. "아, 내가 그런 법을 만든 죄를 이렇게 받는구나(嗟乎, 爲法之弊一至此哉)!" 그만큼 법의 시행이 빈틈없었다는 얘기지만 '법을 만드는 자, 법의 바깥에 있다'는 독선이 드러난 대목이기도 하다.
상앙의 법치가 법을 위한 법치였다면 제갈량(諸葛亮, 181~234년)은 만인을 위한 법치를 실천했다. <삼국지연의>의 소설적 과장 덕분에 군사적 천재로 더 익숙한 제갈량이지만 실제 역사는 '정치 방면의 재간이 군사보다 뛰어났다(理民之幹, 優於將略)'고 평가한다.
천하삼분(天下三分)을 위한 근거지로 청두(成都)를 차지한 제갈량은 '법에 의한 통치(以法治蜀)'를 선언했다. 당시 이곳은 왕조 말기의 지방 자립정권이 늘 그랬듯이 힘있는 자가 독식하는 사회였다. 특권층이 횡행하고 부패한 관리들이 설쳐댔다. 정권의 합법성이 결여되면 포퓰리즘에 기댈 수밖에 없다. 유장 정권은 기회있을 때마다 대사면(大赦)을 베풀었다.
"백성을 살리는 정치는 볼 수 없고 법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으며(德政不擧, 威刑不肅), 못살겠다며 변혁을 꾀하는 자가 열 집에 여덟은 됐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이 만든 법률을 촉과(蜀科)라고 하는데, 유비 정권이 따로 사관을 두지 않아서 그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법치를 '인색하다'고 비난한 데 대해 대꾸한 말을 보면 법 적용이 매우 준엄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는 큰 덕으로 다스려야지 작은 은혜나 베푸는 것으로 해서는 안된다(治世以大德, 不以小惠)." <사면에 인색하다는 견해에 답함(答惜赦)>
자신있는 정권이 아니면 함부로 할 수 없는 얘기다. 그의 법치는 '먼저 강한 자부터 다스린다(先理强, 後理弱)'는 원칙이었다. 힘센 자의 불법과 관리의 자의를 통제함으로써 민생을 도모한다는 것이었으니, 유가의 슬로건인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정치(仁者愛人)'와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제갈량에 이르러 실제 정치현장의 법가와 유가가 융합되고, 법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악이라는 중국의 법정신이 태동하게 되는 것이다.
정부가 법치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법치는 당연한 것이지만 큰 틀에 찍혀야 할 강조의 방점이 소소한 데까지 미친다. 이러다보면 모든 것을 '법대로 하자'며 달려드는 각박한 세태가 될까 걱정된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
그는 일상의 세세한 구석까지 모든 것이 법으로 규율되는 시스템을 꿈꿨으며, 이를 위해서는 절대적인 준법이 전제돼야 했다.
"도성 남문에 긴 나무를 세워두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金)을 준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백성들이 모두 머뭇거리자 다시 50금을 준다고 약속했다. 한 사람이 이를 옮기자 즉시 그 돈을 주었다. " <사기 상군열전>
상앙의 법치는 형식적인 법과 기계적 운용으로 요약된다. 엄벌주의와 연좌제를 통한 효율적인 동원 덕분에 진은 10년 만에 부국강병을 이뤘다. 그러나 백성을 국가발전을 위한 도구로만 취급하는 각박한 정치로 인해 그는 모든 원망의 표적이 됐다.
권력의 원천이었던 효공이 죽자마자 그는 모반죄로 몰려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그는 체포를 피해 달아날 때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여관에서 쫓겨나자 이렇게 탄식했다. "아, 내가 그런 법을 만든 죄를 이렇게 받는구나(嗟乎, 爲法之弊一至此哉)!" 그만큼 법의 시행이 빈틈없었다는 얘기지만 '법을 만드는 자, 법의 바깥에 있다'는 독선이 드러난 대목이기도 하다.
상앙의 법치가 법을 위한 법치였다면 제갈량(諸葛亮, 181~234년)은 만인을 위한 법치를 실천했다. <삼국지연의>의 소설적 과장 덕분에 군사적 천재로 더 익숙한 제갈량이지만 실제 역사는 '정치 방면의 재간이 군사보다 뛰어났다(理民之幹, 優於將略)'고 평가한다.
천하삼분(天下三分)을 위한 근거지로 청두(成都)를 차지한 제갈량은 '법에 의한 통치(以法治蜀)'를 선언했다. 당시 이곳은 왕조 말기의 지방 자립정권이 늘 그랬듯이 힘있는 자가 독식하는 사회였다. 특권층이 횡행하고 부패한 관리들이 설쳐댔다. 정권의 합법성이 결여되면 포퓰리즘에 기댈 수밖에 없다. 유장 정권은 기회있을 때마다 대사면(大赦)을 베풀었다.
"백성을 살리는 정치는 볼 수 없고 법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으며(德政不擧, 威刑不肅), 못살겠다며 변혁을 꾀하는 자가 열 집에 여덟은 됐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이 만든 법률을 촉과(蜀科)라고 하는데, 유비 정권이 따로 사관을 두지 않아서 그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법치를 '인색하다'고 비난한 데 대해 대꾸한 말을 보면 법 적용이 매우 준엄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는 큰 덕으로 다스려야지 작은 은혜나 베푸는 것으로 해서는 안된다(治世以大德, 不以小惠)." <사면에 인색하다는 견해에 답함(答惜赦)>
자신있는 정권이 아니면 함부로 할 수 없는 얘기다. 그의 법치는 '먼저 강한 자부터 다스린다(先理强, 後理弱)'는 원칙이었다. 힘센 자의 불법과 관리의 자의를 통제함으로써 민생을 도모한다는 것이었으니, 유가의 슬로건인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정치(仁者愛人)'와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제갈량에 이르러 실제 정치현장의 법가와 유가가 융합되고, 법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악이라는 중국의 법정신이 태동하게 되는 것이다.
정부가 법치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법치는 당연한 것이지만 큰 틀에 찍혀야 할 강조의 방점이 소소한 데까지 미친다. 이러다보면 모든 것을 '법대로 하자'며 달려드는 각박한 세태가 될까 걱정된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