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육사는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고 했다. 해방을 불과 두어 달 앞두고 만주의 여순 감옥에서 죽어가면서도 청포 입고 찾아올 손님을 바랐던 시인.오늘 우리의 현실은 정녕 그가 바랐을 청포 입은 손님이 찾아와 준 바로 그런 시대일까? 에너지가 넘쳐나서인지 싸움꾼들 시대 같다. 직설적 직선적으로 따지고 대드는 혀 때문에,어제의 우정은 너무 쉽게 원한이 되어버린다. 여야 사이,노사 사이,노노 사이,부부 사이,부모자녀 사이,형제끼리도 세 치 혀 밑에 도끼날이 들어있다는 속담대로 되어 가는 것만 같다.

아잇적에 눈에 이물이 들어가 울면,할머니는 물로 당신 입을 헹궈내고는,혀를 길게 빼어 눈 속을 쓰윽 핥아서 이물을 혀로 닦아냈다. 우리 몸 중에 가장 부드러운 혀가 지금 서로에게 깊고 아물기 힘든 상처를 주는 시대가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신(神)의 선은 곡선인데 인간의 선은 직선이라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곡선으로 만들어 냈다. 아파트 성당 공원 등에 신의 손길이 스친 듯 자기 고장 바르셀로나에 신의 세계를 창조하려 애썼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종교적 영성과 함께 시적 향기가 풍겨난다. 시예술도 직설 직선적 표현 아닌,곡선적 에둘러 말하기가 아닌가. "10원짜리 동전을 줍다"하면 시가 안되지만,"다보탑을 줍다"하면 시가 되는 이유이다.

풍자시가 아니더라도 에두르는 곡선적 모순적 표현은 거짓말로 참말하기이다. 세상은 혼재된 거짓과 참이라는 모순투성이로 거짓의 힘,모순의 힘을 빌려서야 참의 참다움이 나타나기 때문에,참은 거짓을 이웃해서 거짓의 덕으로 진가를 평가받는다.

시의 목숨은 참말하기이지만,참말로 참말하면 성현의 어록이나 종교경전이지,시라는 언어예술은 아니다. 따라서 거짓을 이웃하여 빛을 얻는 참을 시로 표현하기에는 거짓말로 참말하기가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거짓말 공부중이고.웃겨서 깊이 오래 울리기를 공부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당장 탄로날 거짓말을 감쪽같이 하여,하고 싶은 참말을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제 집 개가 방금 새끼를 낳았는데,오늘 드는 어머니 제사는 안 지내도 되지요?"라는 말에 황희정승은"그렇겠구만!"하고 대답했다. 바로 이어 또 한사람이 찾아와서,"방금 집사람이 딸을 해산했는데 조부님 제사를 지내야지요?"라고 하자,"물론 지내야지"라고 했단다. 두 사람은 길에서 만나 황정승이 각자에게 해준 말을 나누다가,마침내 황정승이 하고 싶었던 참말을 알아냈다. 제사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추모인데,추모할 마음이 없으면 제사가 무슨 소용이냐는 참말을 알아낸 것이다.

거짓말로 참말하는 여유는 해학의 태반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호랑이라거나 포도청이라거나 분분할 때,정수동(또는 정만서)은 호피를 깔고 앉은 사또를 보며 뭐니뭐니 해도 제일 무서운 건 호랑이 탄 괴물이라 했단다. 거짓말로 참말하는 유머나 위트는 상처와 스트레스를 치유하고 회복시켜주는 심리적 스포츠로서,시인 자신은 물론 독자에게도 효능이 전이된다. 성숙한 개인과 사회의 여유이고,리더십의 요건이고 창의력의 첫째 요소로,고도로 철학적이다.

유머와 위트의 태반인 심리적 여유란 자기 성찰에서 나온다. 형제 눈의 티를 나무라기 전에 제 눈에 박힌 들보를 발견하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신부님에게 한 형제가 물었다. 신부님의 대답을 들은 그는 안경점에 갔으나,아주 깜깜한 선글라스가 없어 특별 주문했다. 그렇게 깜깜하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하자,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는 깜깜할수록 좋다고 했단다. 유머와 위트의 여유에는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쓰는 깜깜한 선글라스가 필요하다는 뜻이겠다.

유안진 시인·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