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근대적인 시장으로 1905년 어제(7월5일) 문을 연 서울 종로구 예지동 광장시장을 꼽는다. 일제의 경제침탈에 맞서 김종한 등 4인의 발기인이 토지 · 현금 10만원을 갹출,주식회사 형태로 출범했다. 당시로선 조선시대 3일장,5일장을 대신해 언제든지 물건을 살 수 있는 유통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100년 재래시장도 90년대 들어 '마이 카' 붐과 라이프스타일 변화로 위기에 빠졌다. 편리한 주차,쾌적한 쇼핑환경,저렴한 정찰가격을 무기로 내세운 대형마트가 벌써 400개에 육박한다. 정부가 재래시장 환경 개선을 지원하곤 있지만 지난 4년간 대형마트 매출이 9조원 늘어난 대신 재래시장은 같은 금액만큼 줄어든 게 현실이다. 지자체마다 대형마트 출점을 놓고 지역 상인들과 유통업체 간의 마찰,소송이 비일비재하다.

여기엔 재래시장의 취약한 이미지도 한몫했다. 호객,강매,바가지,고무줄 가격,정체 모를 원산지에다 안 사고 나오면 뒤통수가 따갑고 반품 · 교환 · 환불 · AS도 잘 안 된다. '제왕' 대접을 받는 소비자들이 이런 불편과 불쾌감을 감수할까. 도대체 가격을 얼마로 불러야 할지,믿을 만한 제품인지,하자가 있으면 바꿀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이것저것 따지고 가격 협상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골치 아프다. 소비자 선호는 점점 까다로워지는데 재래시장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고유가 여파로 '기업형 슈퍼'로 불리는 대형 슈퍼마켓(SSM)이 부쩍 늘면서 사정이 더 복잡해졌다. 이미 전국에 600개에 육박하는 SSM이 아파트단지,골목상권에 파고들었다. 대형마트가 포화상태이고 부지 확보나 신설허가가 어려워지자 유통업체들은 앞다퉈 SSM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영세상인들의 먹고사는 문제로 직결됐다. 급기야 정부가 대형마트 · SSM 출점속도 제한을 추진하고,의원들은 앞다퉈 허가제 전환,영업시간 · 취급품목 제한 등 규제 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출점을 막는다고 소비자들의 발길을 재래시장이나 동네 슈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소비자들은 동네 슈퍼의 어려움에 심정적으로 동조해도 불편을 감수하진 않는다. SSM을 찾는 주부들은 "싸고 편리하고 다양하고 믿을 수 있고 위생적이고 가까워서 좋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SSM의 장점인 동시에 재래시장과 동네 슈퍼의 미흡한 부분이다. 법원도 출점 관련 소송마다 영세상인 보호보다는 소비자 선택권을 우선시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동네 상권은 각개전투로는 대형마트와 SSM의 틈바구니에서 버티기 힘들다. 그렇다면 동일 업종 소매점들이 모여 공동구매로 가격을 낮추고 공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을 강구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공동 브랜드 아래 각 점포가 독립적으로 경영하면서 체인화의 이익도 누리는 '연쇄점(voluntary chain)' 형태를 의미한다. 당장 어렵더라도 무자료 거래의 유혹도 접어야 한다.

대형 유통업체들도 말로만 상생을 외치지 말고 중소상인들과 연계한 SSM의 체인화 사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SSM 출점이 누군가를 죽이는 게임이 아니라 집객효과를 활용해 동네 상권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그게 진짜 상생이다. 정부 · 정치권이나 대형 유통업체,영세상인들 모두 해법은 소비자에게서 찾아야 한다.

오형규 생활경제부장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