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가 또 하나의 역작을 내놨다. 15권짜리 대작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 제국의 흥망사를 다뤘던 그가 이번에는 로마 멸망 이후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신작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 로마의 쇠망 후 주인이 없어진 지중해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의 패권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1000년에 걸친 이슬람과 유럽의 쟁패는 한 편의 대하 다큐드라마 같다.

상권에서는 8~10세기의 주인 없는 바다를 누비는 사라센 해적의 잔인함과 기독교 세계의 힘겨운 반격을 그린다. 이탈리아 4대 해양도시국가의 활약과 십자군 원정,해적에 납치돼 북아프리카에서 노예 신세가 된 기독교도들을 구출하기 위해 결성된 '구출수도회'와 '구출기사단'의 활동도 다룬다.

하권에서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뒤 해적들을 앞세워 서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도하는 오스만투르크제국과 이에 맞서는 기독교 연합세력 간의 치열한 공방을 묘사한다. 술레이만 1세,메메드 2세,프랑수아 1세,카를로스 1세(카를 5세),교황 레오 10세,해적 바르바로사,안드레아 도리아 등 영명한 군주들과 걸출한 지도자들의 두뇌전략이 흥미롭다. 프레베자 해전과 제르바 해전,키프로스 공방전,레판토 해전 등 지중해의 운명을 건 문명 간의 전쟁도 드라마틱하다.

저자의 일관된 시각은 '팍스 로마나'가 무너진 뒤 지중해의 '팍스(평화)'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평화란 어떤 의미인가. 그는 평화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을 '해적'의 등장에서 찾는다. 이들은 오늘날 소말리아 인근 해상의 소규모 해적이 아니라 이슬람 세력의 묵인 아래 조직적으로 활동한 '공인된 해적'이었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했다. 이슬람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오른손엔 칼,왼손에는 코란'이라는 구호가 바로 이 시절의 사라센 해적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는 '진정한 이슬람은 폭력을 싫어한다'는 주장에 대해 '불신앙의 무리를 만났을 때는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포로를 연결하는 쇠사슬을 단단히 조여라'는 코란 구절을 인용하며 반박한다. 특히 이 시기의 이슬람 해적은 약탈 행위와 '선교'의 두 가지 임무를 모두 띠고 있었고,이슬람을 적대시하는 이들에 대해 '성전(지하드)'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바다를 장악한 이슬람 세력은 바다 너머까지 진출하고자 했고,지중해의 격전은 주변 영토로 확대됐다. 유럽 입장에서 보면 사라센의 해적들이 활개치는 지중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기독교 국가들이 들고일어났다. 기독교 국가들은 종교적인 동기부여로 '십자군'을 일으켰고 수도회와 기사단을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비잔티움(동로마제국)은 이들 해적에 단호히 맞서지 못했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지역을 빼앗겨 세력이 꺾인 데다 북쪽에서는 내려오는 슬라브족을 막느라 여력이 없었다. '팍스 로마나' 시절에는 통치자가 적어도 자국민의 안전은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런 정치적 의지를 지녔지만 이 시기에는 그런 생각도 무너져버렸다.

이 대목에서 "평화는 간절히 바라는 것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관점이 도드라진다. '인간에게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누군가가 평화를 어지럽히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분명히 언명하고 실행해야만 비로소 평화가 현실화되는 법이다. 따라서 평화를 확립하는 것은 군사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였다. '

책을 읽다 보면 시오노 나나미의 엄청난 열정에 놀라고 뛰어난 필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2006년 일흔의 나이에 15년에 걸친 《로마인 이야기》의 집필 대장정을 끝냈을 때 그는 한 해 한 권을 반드시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한번도 갖지 못했던 긴 '여름방학'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2년간 잠시도 쉬지 않았고,쓰지 않으면 안 되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다시 '글 감옥'에 자신을 가두었다. 열여섯 살 시절부터 자신을 매료시켰던 《일리아스》의 무대,문명의 바다 지중해가 그를 '탁월한 역사 저술가'로 또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