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지금 어디 계셔?" "스터디하러 가셨는데요. "

포스코 A상무는 요즘 가욋일이 하나 더 늘었다. 업무 시간을 쪼개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강의를 듣고 토론도 해야 한다. 별도의 '스터디 팀'도 꾸려졌다. 주제는 '복수 노조'.주로 마케팅 부서를 거쳤던 A상무에게는 생뚱맞은 내용이다. 시간만 때우면 대충 끝나는 보통의 연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해진 시간 내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프레젠테이션도 해야 한다. 그것도 정준양 포스코 회장 앞에서.

정 회장 취임 이후 포스코가 거대한 학습조직으로 바뀌고 있다. 1차 타깃은 부장급 이상 간부들.평소 생각지 못했던 주제들을 놓고 '열공 중'이다. 낯선 공부를 통해 임직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통해 차세대 포스코 최고경영자(CEO)를 길러 내겠다는 정 회장의 복안이 깔려 있다. 포스코의 'CEO 승계 프로그램'이 본격 가동되고 있는 셈이다.

◆장기 과제와 씨름하는 상무들

포스코는 최근 '상무 2년차' 임원들을 대상으로 세 개의 스터디 팀을 만들었다. 포스코 본사에서 9명,포스코건설과 포스코파워 등 계열사에서 5명을 뽑아 냈다. 정 회장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다. 학습 주제도 '위에서' 내려왔다. 하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이고 다른 두 가지는 '포스코 패밀리의 지속가능 성장을 위한 경영 체계' 및 '복수노조 문제와 대응 방안'이다. 단기간에 후다닥 처리할 수 있는 성격의 과제가 아니다.

스터디 팀에 소속된 상무들은 10월 중순까지 최종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남은 시간은 3개월 남짓.빠듯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무들은 외부 강사를 섭외하고 국내외 방문 일정 등을 잡느라 분주하다. '경영 패러다임'팀에 배정된 B상무는 "처음엔 왜 하필 상무 2년차냐는 푸념도 나왔지만 지금은 모두 진지하게 과제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젊은 임원들부터 그룹 전반에 대한 혜안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칸트 정도는 알아야

지난 8일 포스코 서관 4층 아트홀.오전 6시30분 무렵부터 포스코 간부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7시가 되자 강의가 시작됐다. 이날의 주제어는 '칸트'.서울대 철학과 백종현 교수가 칸트의 일생과 기본 철학에 대해 한 시간 반 동안 강의했다. 포스코가 매주 수요일 여는 '인문학 강좌' 시간이다.

졸릴 만도 한데 이제 대부분 적응이 된 듯했다. 이날이 벌써 세 번째 강의다. 1회와 2회 주제는 '소크라테스'와 '니체'였다. 강의를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대상은 다른 회사 부장급에 해당하는 그룹장 이상이다. 몰래 빼먹기는 힘들다. 정 회장이 언제 참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날 칸트 강좌에도 정 회장이 자리를 지켰다. 참석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솔직히 철판 파는 데 니체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부정론부터 "모처럼 지적 갈증을 풀었다"는 긍정론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강의를 듣고 나오는 간부진 사이에 농담이 오갔다. "다음주 주제는 돼지고기라며?" 다음주 수요일에 등장할 철학자가 '베이컨'이라는 것을 빗댄 말이다. 강의에 대한 평가는 달라도 수요 강좌에 대한 관심 자체는 높은 셈이다.

회사 관계자는 "정 회장은 문과와 이과를 넘나드는 '통섭형' 인재를 원한다"며 "올해부터 사무직 신입사원들을 모두 제철소 현장에서 장기간 근무토록 한 것도 이런 생각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