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한국시간) 2009US여자오픈 마지막 라운드가 펼쳐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베슬리헴의 사우컨밸리CC 올드코스 18번홀(파4).17번홀까지 1오버파로 캔디 쿵(대만)과 공동 선두를 달리던 지은희(23 · 휠라코리아)의 버디 퍼트에 시선이 집중됐다. 6m의 쉽지 않은 거리로,성공하면 우승이요,놓치면 연장 돌입의 순간.퍼트라인을 살핀 지은희가 주저없이 친 볼은 데굴데굴 구르더니 마법처럼 홀로 사라졌다.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린 챔피언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고인 듯했다. 수백명의 갤러리들도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연장전을 준비하던 쿵은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듣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퍼터를 걷어올렸다. 지은희가 메이저대회에서 처음 우승컵을 거머쥔 드라마는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지은희가 이날 우승을 차지하기까지는 '불독' 같은 승부근성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전날 폴라 크리머(미국)가 '트리플 보기'를 범한 10번홀(파4)에서 티샷과 두 번째 샷이 연달아 벙커에 들어가 4온2퍼트(더블 보기)를 기록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2위에서 공동 4위로 내려앉으며 우승 행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지은희는 "10번홀에서 실망이 컸지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오히려 마음 편하게 칠 수 있었다"고 말해 위기 때 더 침착한 모습을 보여줬다. 지은희는 13번홀(파4) 두 번째 샷을 홀 50㎝ 옆에 붙여 버디를 낚은 데 이어 14번홀(파4)에서도 20m 거리의 버디 퍼트를 홀에 떨어뜨리며 곧바로 선두 그룹에 합류한 뒤 '최종 홀 버디'로 메이저대회 우승방정식을 극적으로 만들어냈다. 전날까지 2타 차 단독 1위였던 크리스티 커(미국)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지은희의 승부근성에 눌린 탓인지 이날만 4타를 잃고 김인경(21 · 하나금융)과 함께 공동 3위를 기록했다.

이번 우승은 아버지 지영기씨(55)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에 대한 '화답'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지은희는 경기 가평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98년 한연희 현 골프국가대표팀 감독의 권유로 골프클럽을 잡았다. 수상스키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낸 지씨는 운동선수 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 잘 알기 때문에 딸에게 골프를 시킬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해 골프 열풍이 거셌던 데다 딸의 소질을 간파하고 캐디로 '생업'을 변경한 뒤 지원에 나섰다. 그는 딸이 언제든지 연습할 수 있도록 골프연습장을 차렸고,지금도 아내와 번갈아가며 딸 응원부대에 합류한다.

지은희가 챔피언조의 부담을 딛고 역전 우승할 수 있었던 데는 정확한 아이언샷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선수들은 그의 아이언샷이 곧게 날아가는 것을 보고 지은희를 '아이언 지'라고 부른다. 지씨는 가평에 있는 청평호 가운데에 거리별로 줄줄이 네모난 스티로폼을 띄워 놓고 딸에게 아이언샷을 연습시켰다고 한다. 지은희가 볼을 다 치면 지씨는 직접 수영을 해서 볼을 회수해 왔던 것.미 LPGA투어 후배 오지영은 "은희 언니는 볼을 똑바로 친다. 컨디션에 굴곡이 별로 없어 항상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지은희는 "아이언샷에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고 꾸준히 연습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샷이 부드러워졌다"고 말했다.

고교 때 이미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던 지은희는 2004년 프로무대에 뛰어든 뒤 3년간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하는 시련을 맞는다. 그러다가 2007년 심기일전,휘닉스파크클래식과 KB스타투어 2차대회에서 우승하며 신지애 안선주와 함께 '국내 3인방'으로 떠올랐다. 더욱이 그해 미 LPGA투어 4개 대회에 초청받아 상금랭킹 52위에 오르며 지난해에는 풀 시드권을 확보했다. 지은희는 작년 6월 웨그먼스LPGA에서 투어 첫 승을 신고했지만 이후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한 데다 올해 초 몇몇 한국 선배의 '텃세'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그는 이번 우승으로 부진과 시련을 날려버림과 동시에 미 LPGA투어 내 '간판 한국 선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흥국화재는 지은희에게 3억원의 보험금을 지급키로 했다. 지난 2월 지은희의 스폰서인 휠라코리아와 상품보상보험 계약을 통해 그가 올해 미 LPGA투어와 KLPGA투어에서 우승하면 최고 3억원을 주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