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종근의 史史로운 이야기] 도연명, 또한번의 歸去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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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 : 선생님, 저는 이제 쉬고 싶습니다.
공자 : 살아서는 편히 쉴 곳이 없느니라.
자공 : 그러면 제가 쉴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까?
공자 : 있기야 하지.저 무덤이 바로 네가 편히 쉴 곳이다.
자공 : 아! 죽음이란 군자에게는 편안한 휴식이지만,소인들에겐 공포의 대상이군요(君子息焉,小人伏焉).
공자 : 너는 벌써 그것을 깨쳤구나. 사람들은 모두 삶의 즐거움만 알고 괴로움은 모르며,늙음이 피곤한 줄만 알고 편안한 것은 모른다. 죽음이 나쁘다고만 알 뿐 그것이 휴식이라는 것을 모른다. ―<열자 천서(列子 天瑞)>
공부에 싫증난 자공이 어느날 스승 공자와 나눈 문답이다. 물론 '아직 삶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未知生,焉知死)'라며 철저한 현세주의를 내세운 공자 학단에서 오갔을 리 만무한 꾸며 낸 이야기일 뿐이다. <열자>는 <장자>와 함께 죽음의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는데, 이 문답 바로 다음에는 중국적 생사관을 대표하는 유명한 문장이 뒤따른다.
"옛날에는 죽은 이를 '돌아갔다(歸人)'고 했다. 그러므로 인생은 '길을 가는 것(行人)'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을 떠돌며 돌아갈 줄 모른다면 이는 곧 집을 잃은 사람이다(行而不知歸,失家者也)."
그래서 하우(夏禹)는 '삶이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임시 거처일 뿐,죽음이야말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生寄也,死歸也)'이라고 했고,이백은 '인생은 나그네(生者爲過客)'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도연명(陶淵明: 365~427년)은 전원 시인,은일(隱逸) 시인으로 일컬어지지만 죽음의 문제를 천착한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마흔 한 살 때 다섯 번째 사표를 던지고 '돌아가련다(歸去來)'를 노래하며 귀향했다. 가난한 은자의 도도한 즐거움을 만끽한 대선배의 삶을 소식(蘇軾)은 이렇게 흠모했다.
"연명은 벼슬하고 싶으면 나가서 했고,은퇴하고 싶으면 바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고결하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배 고프면 남의 대문 두드리기를 마다 않았고,넉넉할 땐 닭 잡고 술 빚어 손님을 청했다. " ―<동파평론집(東坡題跋)>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고 음주를 찬양하는 속에서도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내려놓지 않았다. 예순 세 살의 시인은 마침내 <나의 만가(挽歌詩)> 3수와 제문을 스스로 짓고 세상을 떠났다.
"도 아무개는 이제 잠시 머물렀던 여관을 떠나 본가로 돌아가려 한다(陶子將辭逆旅之館,永歸於本宅)… 수명은 백 살을 누렸고 몸도 자유롭게 살았다. 살 만큼 살고 늙어서 죽는데 무엇을 또 바랄 것인가… 내 무덤엔 봉분도 없고 나무도 심지 않아, 해와 달이 그저 지나가리라." ―<자신을 제사하는 글(自祭文)>
"자연의 대변화 물결 속에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끝내야 할 것이면 끝내면 그만이니,더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다. "―<정신이 하는 말(形影神-神釋)>
육신과 그림자가 잘 죽는 방법을 서로 다투는데 정신이 끼어들어 이렇게 훈수했다. 시인의 생사관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중국인에게 정신적 스승이었던 석학 지셴린(季羨林)이 얼마 전 98세로 타계했다. 이 귀절을 평생 좌우명으로 실천했던 그도 아흔 살이 넘어서야 겨우 죽음에 담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라의 원로가 이런 여여(如如)로운 정신을 지닐 때 그 사회의 품격 또한 고상해지는 법이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
공자 : 살아서는 편히 쉴 곳이 없느니라.
자공 : 그러면 제가 쉴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까?
공자 : 있기야 하지.저 무덤이 바로 네가 편히 쉴 곳이다.
자공 : 아! 죽음이란 군자에게는 편안한 휴식이지만,소인들에겐 공포의 대상이군요(君子息焉,小人伏焉).
공자 : 너는 벌써 그것을 깨쳤구나. 사람들은 모두 삶의 즐거움만 알고 괴로움은 모르며,늙음이 피곤한 줄만 알고 편안한 것은 모른다. 죽음이 나쁘다고만 알 뿐 그것이 휴식이라는 것을 모른다. ―<열자 천서(列子 天瑞)>
공부에 싫증난 자공이 어느날 스승 공자와 나눈 문답이다. 물론 '아직 삶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未知生,焉知死)'라며 철저한 현세주의를 내세운 공자 학단에서 오갔을 리 만무한 꾸며 낸 이야기일 뿐이다. <열자>는 <장자>와 함께 죽음의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는데, 이 문답 바로 다음에는 중국적 생사관을 대표하는 유명한 문장이 뒤따른다.
"옛날에는 죽은 이를 '돌아갔다(歸人)'고 했다. 그러므로 인생은 '길을 가는 것(行人)'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을 떠돌며 돌아갈 줄 모른다면 이는 곧 집을 잃은 사람이다(行而不知歸,失家者也)."
그래서 하우(夏禹)는 '삶이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임시 거처일 뿐,죽음이야말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生寄也,死歸也)'이라고 했고,이백은 '인생은 나그네(生者爲過客)'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도연명(陶淵明: 365~427년)은 전원 시인,은일(隱逸) 시인으로 일컬어지지만 죽음의 문제를 천착한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마흔 한 살 때 다섯 번째 사표를 던지고 '돌아가련다(歸去來)'를 노래하며 귀향했다. 가난한 은자의 도도한 즐거움을 만끽한 대선배의 삶을 소식(蘇軾)은 이렇게 흠모했다.
"연명은 벼슬하고 싶으면 나가서 했고,은퇴하고 싶으면 바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고결하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배 고프면 남의 대문 두드리기를 마다 않았고,넉넉할 땐 닭 잡고 술 빚어 손님을 청했다. " ―<동파평론집(東坡題跋)>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고 음주를 찬양하는 속에서도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내려놓지 않았다. 예순 세 살의 시인은 마침내 <나의 만가(挽歌詩)> 3수와 제문을 스스로 짓고 세상을 떠났다.
"도 아무개는 이제 잠시 머물렀던 여관을 떠나 본가로 돌아가려 한다(陶子將辭逆旅之館,永歸於本宅)… 수명은 백 살을 누렸고 몸도 자유롭게 살았다. 살 만큼 살고 늙어서 죽는데 무엇을 또 바랄 것인가… 내 무덤엔 봉분도 없고 나무도 심지 않아, 해와 달이 그저 지나가리라." ―<자신을 제사하는 글(自祭文)>
"자연의 대변화 물결 속에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끝내야 할 것이면 끝내면 그만이니,더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다. "―<정신이 하는 말(形影神-神釋)>
육신과 그림자가 잘 죽는 방법을 서로 다투는데 정신이 끼어들어 이렇게 훈수했다. 시인의 생사관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중국인에게 정신적 스승이었던 석학 지셴린(季羨林)이 얼마 전 98세로 타계했다. 이 귀절을 평생 좌우명으로 실천했던 그도 아흔 살이 넘어서야 겨우 죽음에 담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라의 원로가 이런 여여(如如)로운 정신을 지닐 때 그 사회의 품격 또한 고상해지는 법이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