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생산지이자 프랑스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도시다. 프랑스어로 보르도(Bordeaux)는 '물의 가장자리에'(Au Bord de l'eau)이고 대표적 와인생산지역인 메독(Medoc) 또한 라틴어로 '물이 많다'(Medio Aquae)는 뜻이다. 실제로 이들 지역은 물과 연관이 많다. 인근에 가론,지롱드 강뿐 아니라 대서양까지 접해 있어 일찍부터 해상을 통한 무역거래가 활발했다. 특히 와인생산과 유통이 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다른 지역들과 달리 보르도 지방에서는 영리가 목적인 상인들이 와인생산과 유통을 장악했다. 따라서 변화하는 시장수요에 맞춰 포도밭을 넓히거나 와인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속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빨랐다.

'와인을 알려면 프랑스 와인을 알아야 하고,프랑스 와인을 알려면 보르도 와인을 알아야 한다. ' 현재 와인의 세계에서 보르도 와인이 가진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실제로 보르도 지방은 여러면에서 '세계와인의 메카'다. 2만2000개가 넘는 포도밭의 전체 크기는 독일 전역의 포도밭을 합친 것보다 넓고,뉴질랜드 포도밭 크기의 열 배가 넘는다. 비록 샤토(Chateau)로 불리는 성(城) 건축물이 있는 곳은 1000개도 되지 않지만,1만개 이상의 양조원에서 매년 7억병의 와인이 생산된다.

특히 1855년 이래 잘 정비된 등급 규정과 관리시스템으로 5대 샤토의 그랑 크뤼급 와인뿐 아니라 크뤼 부르주아,크뤼 아티산 등 다양한 등급의 와인들이 많이 생산된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영국인들의 활발한 수입과 소비,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인들의 생산과 관련된 결정적인 기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보르도 와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보르도 와인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네덜란드인이 개간하고 향상시킨 포도밭과 와인 생산기술을 이용해 프랑스인이 생산하고 영국인이 마신 와인'이라 할 수 있다.

보르도 지역에 포도나무가 처음 심어진 것은 약 2000년 전 로마시대다. 기원 후 4세기께 보르도 출신의 유명한 시인이자 골 지방총독인 오존(Ausonne)은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음식은 시저의 식탁 위에 내 놓아도 손색없는 보르도산 생굴이다. 혀 안에서 살살 녹는 하얗고 기름진 이 굴들은 우리지방의 와인만큼 맛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보르도의 포도밭 규모는 매우 작았으며 와인 생산량 또한 미미했다. 보르도가 국제와인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13세기 때다. 남부 보르도 지방을 관할하던 아키텐공국의 엘레오노르(Eleonore) 공주는 루이 7세와 이혼하고,1152년 노르망디공작인 앙리 플라테네제(Henry Plantagenet)와 재혼했다. 2년 뒤 앙리가 영국 왕 헨리2세가 되자 그녀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간 아키텐공국은 영국,노르망디와 한나라가 됐다. 공주의 막내아들인 영국의 존 왕은 보르도 사람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동시에 1203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전함과 군수물자를 조달해 준 대가로 보르도 와인에 부과되던 수입관세를 면제해줬다. 이때 영국의 와인시장은 규모가 너무 커서 많은 부족분을 수입으로 해결했는데 이 특혜조치로 값이 싸진 보르도 와인은 봇물 터지듯 영국으로 수출됐다.

1224년 영국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소비된 와인의 4분의 3이 보르도 와인이었으며,영국은 한때 와인 구입을 위해 무려 200여척의 함선을 동원하기도 했다. 와인이 통째로 수송되면서,배의 선적용량을 나타내는 척도가 배에 실을 수 있는 와인 통(tonneaux)의 숫자 즉 톤(ton) 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가장 인기 있던 보르도 와인은 1~2일 발효시킨 연하고 밝은 빛깔의 레드 와인으로,맑다는 의미의 '클라렛'(Claret:프랑스어로 Clariret)이라 불렀다. 17세기 이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등으로 소원해진 영국을 대신해 네덜란드인들이 주요 수입업자로 등장하면서 보르도 와인의 스타일은 지금의 보르도 와인으로 급격히 변모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달콤한 화이트 와인 그리고 오늘날의 보르도 와인의 특성인 색이 짙고 오랫동안 숙성이 가능한 레드 와인의 생산이 장려됐다. 이때 스위트 와인으로 유명한 소테른지방이 개발되었으며,지금까지 와인 생산의 중심이던 그라브 외에 물 많은 습지인 메독 지방도 새로이 포도밭으로 개간됐다. 그들은 와인의 생산방법까지도 크게 변화시켰는데,긴 발효과정을 거친 짙은 붉은색의 텁텁한 와인들은 숙성을 위해 오크통 속에서 오랫동안 보관한 것들이다.

와인 칼럼니스트 · 여유공간 대표 sowhatcho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