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두세 번 외출한다는 그에겐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였다. 1년 내내 일산의 집 근처 사무실에서 번역에 몰두하며 집과 사무실만 오가기 때문이다. 과학도서 전문번역가 이한음씨(43).1998년에 나온 《복제양 돌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97권의 번역서를 낸 베테랑 번역가다. 과학의 눈으로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가이아의 복수》 《남자는 왜 젖꼭지가 있을까》 등 베스트셀러도 여럿이다. 소설이나 자기계발서,실용서처럼 잘 팔리지는 않지만 과학 대중화를 위해 꾸준히 책을 번역하고 있는 그를 서울 망원동의 한 출판 번역회사 사무실로 불러냈다.

▼번역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결혼 전에 전세방을 같이 쓰던 대학 동기가 사이언스북스(민음사 과학도서 브랜드) 편집장이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의뢰한 《복제양 돌리》의 번역이 여의치 않자 급하게 저한테 맡겼어요. 그래서 그 책이 저의 첫 번역서로 나왔죠.사실 그 전에 《인간본성에 대하여》를 의뢰받아 번역하고 있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진도가 안 나갔거든요. 《인간본성~》은 그로부터 몇 년이 더 걸려서 책으로 나왔어요. 쉬었다가 번역하고,나중에 새로 번역하기를 세 번이나 거듭하다 출판사의 독촉을 몇 차례 받고서야 원고를 넘겼죠."

▼어떤 점이 어렵던가요.

"지금 보면 어려운 게 없는데 그땐 참 어려웠어요. 특히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 기능이 발달하지도 않았던 때라 잘 풀리지 않는 문구를 만나면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일일이 찾아야 했어요. 가령 《인간본성~》 첫머리에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권두사 같은 게 있었는데 철학적인 내용은 처음 다뤄보는 거라 잘 풀리지 않는 거예요. 서점에 가서 흄에 관한 책을 찾아봐도 전체를 번역한 것은 없고 딱 한 줄로만 처리돼 있어서 결국 선례를 참고하지 못한 채 다 번역해야 했죠.초보 번역자로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번역한 것이 결과적으로 전문 번역가가 되는 데 굉장한 도움을 줬습니다. "

▼전문 번역가,전업 번역가로 나선 지는 얼마나 됐나요.

"《복제양 돌리》를 낸 후 부업으로 한두 권 번역하다 2002년쯤 전업으로 나섰죠.지방도시의 환경직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틀에 매인 일을 반복하다 보니 창의성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만뒀죠."

▼번역 일은 할 만합니까.

"번역은 일하는 만큼 버니까 정직해요. 처음 몇 년 동안은 미혼인 데다 공무원보다 수입도 괜찮다 싶어서 재미있었어요. 일을 할수록 지식도 늘었고요. 특히 어려운 책은 힘이 들긴 해도 머리 속에 남는 게 많았어요. 과학 이외의 분야로 확장할 생각도 하는데 현재로선 번역해야 할 과학 책이 여러 권 있어서 그것부터 해결한 다음에 할 생각입니다. 《타임머신》의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의 단편집을 비롯해 SF 고전 중에서 번역되지 않은 책을 골라보려고 해요. "

▼1년에 몇 권이나 번역하세요. 번역이 밀린 책은 어느 정도인가요.

"출판사에서 번역을 의뢰하는 게 1년에 열몇 권 정도 되는데 지금은 밀린 게 많아서 많이 맡지 않습니다. 많을 땐 1년에 10권가량 번역했지만 지금은 7~8권쯤 해요.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번역한 게 아동서를 빼고도 50~60권쯤 됩니다. 번역이 밀린 책은 항상 10권쯤 있어요. 많은 짐을 쌓아두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아는 출판사에서 의뢰하면 거절할 수 없어서 그렇게 돼요. 많이 일할 땐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하루 16시간씩 번역했죠."

▼영어권 책을 번역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원서 보는 게 힘들지 않나요.

"원서를 찬찬히 읽다 보면 재미있어요. 처음에 멋모르고 번역을 시작했을 때는 실력이 달렸지만 번역을 계속하면서 늘더라고요. 책 한 권 번역하고 나면 그 전보다 실력이 늘고,한 권 더 하면 또 늘고 그렇죠.특히 어려운 책을 번역하고 나면 많이 늘어요. "

▼번역하다 막히면 어떻게 합니까.

"까다로운 문장에 막힐 때도 있고 마땅한 우리말을 찾기 어려울 때도 있죠.그럴 때는 인터넷으로 유례(類例)를 검색해 비슷한 문장의 용법을 보고 해결하죠.사실 번역만 하다 보면 우리말 표현력이 떨어져서 노력을 많이 해야 돼요. 외국 작가들의 새로운 표현에 적합한 말을 찾느라 오랜 시간을 끙끙대기도 하고,과학 전문용어는 번역어가 들쭉날쭉해서 아예 제가 만들어 쓰기도 해요. "

▼번역료는 어떻게 받나요. 번역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짭짤한가요.

"대부분 원고료로 받습니다. 처음엔 주로 인세를 받았는데 과학도서는 독자층이 넓지 않아서 두꺼운 책을 번역하고도 얼마 못 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물론 인세로 계약해서 스테디셀러나 베스트셀러가 되면 좋지요. 제가 번역한 《만들어진 신》(김영사 펴냄)의 경우 생각보다 많이 팔렸지만 저는 원고료로 받아서 판매량과 제 수입은 무관했어요. 대신 그 책으로 2007년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받았으니 저한테도 도움은 됐지요. "

이씨는 《만들어진 신》을 비롯해 《악마의 사도》 《조상 이야기》 등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세 권이나 번역했고, 앨런 그래펀이 쓴 《리처드 도킨스-우리의 사고를 바꾼 과학자》도 우리말로 옮겼다. 도킨스의 책을 계속 번역하다 보니 잘 알고 있는 친구 같은 느낌마저 든다고 했다.

▼번역만 해서 생활하기가 어떻습니까.

"한 달에 한 권은 꾸준히 내야 평균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요. 그러자면 작업량이 많죠.투자하는 시간만큼 버니까요. 그래서 친한 친구나 번역가들끼리는 '변호사나 회계사는 고소득 전문직,우리는 저소득 전문직'이라고 농담도 하죠.안정된 수입을 확보하려면 꾸준히 팔리는 책을 인세를 받고 번역하거나 번역료를 올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초판은 원고료로 받고 추가 판매분에 대해서는 인세로 받는 경우도 꽤 있어요. "

▼과학책을 주로 번역하는 이유가 있나요.

"대학 전공(서울대 생물학과)이 이쪽이기도 하고 번역하면서 알아가는 재미도 있으니까요. 사실 대학에서 석사과정까지 공부했지만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더라고요. 나름대로 공부도 할 겸 과학 대중화에도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사실 첫 번역서를 낼 때만 해도 과학 쪽 번역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고,번역서도 별로 없었어요. 민음사의 사이언스북스처럼 과학전문 출판 브랜드가 생긴 것도 그 무렵이었죠."

▼번역자의 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지만 번역자의 위상은 작가만 못한 게 현실이죠.대우도 그렇고 사회적 지위도 그렇고요. 책값은 해마다 올라가는데 번역료는 7년 전 그대로예요. 국민들이 책을 안 읽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외국처럼 번역가를 독립된 직업으로 보지 않는 측면도 있죠.원서에 종속돼서 '제2의 창작'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

▼원래 책을 좋아했습니까.

"어릴 때부터 '책벌레' 소리를 들었죠.용돈을 받으면 곧바로 서점에 가서 책을 사 밤새워 읽고 다음 날 또 가면 서점 아저씨가 놀라곤 했죠.헌책방에도 많이 갔고요. 공상과학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지금은 번역하느라 책 볼 시간이 없어서 아쉬워요. 간혹 서평 청탁을 받으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반갑죠."

▼앞으로도 계속 전문 · 전업 번역가로 살 계획인가요.

"이젠 번역량을 좀 줄이고 제 글을 쓰려고 해요. 그래도 번역은 계속 할 것입니다. 번역은 이름이 좀 알려지면 일감이 꾸준히 들어오므로 큰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할 만해요. 자기 시간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어느 장소에서나 일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죠.그래서 번역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분도 많습니다. 생업이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얽매이지만 않는다면 이만한 직업도 없죠."

글=서화동/사진=정동헌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