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치 고개는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의 31번 국도상에 있는 고개다. 말 다섯 마리가 겨우 지날 정도의 고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16일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당시 중동부 전선은 인제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미국 10군단이,우측에는 국군 3군단이,3군단의 우측 설악산에서 동해안까지는 국군 1군단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약 30만명의 중공군과 북한군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미 10군단 예하 국군 5,7사단과 국군 3군단 산하 3,9사단을 집중 공격해 5,7사단 방어선을 돌파하고,3군단 전투 관할구역 좌측을 위협했다.

다급해진 3,9사단은 한계리 전선에서 밀리면서 후방 포위를 우려해 후퇴하려 했으나 유일한 퇴각로인 오마치 고개는 이미 7사단 지역을 돌파해 남하해온 중공군 1개 수색중대에 의해 기습 점령돼 있었다. 퇴로를 차단당하고 포위됐다고 판단한 3,9사단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현리에서 사단장과 지휘관들은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방태산 등 산악지역을 통해 오합지졸식 후퇴를 감행했다. 5월27일 최종 수습한 결과 전체 병력의 30%(약 6000명)가 전사 및 실종됐으며,최신예 야포 및 전투장비의 70%를 노획당한 한국전쟁 최대 패전으로 후에 '현리 전투'로 명명됐다.

필자는 그동안 동서양 전쟁사를 즐겨 읽어 왔는데,승패의 역사 속에서 경영의 교훈을 얻고 있다. 현리 전투의 패인을 경영학적으로 해석을 해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첫째,회사 내 조직 간에 비합리적이고 불명확한 역할과 책임(R&R) 설정이다. (오마치 고개는 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 및 퇴각로인데도 미 8군사령부는 미 10군단 작전 관할지역으로 포함시키는 우를 범했다. ) 둘째,최고경영진과 산하 조직 간 소통 부재다. (3군단장은 그 중요성을 감안해 오마치 고개를 3군단이 방어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을 미 8군 최고사령부에 수차례 건의했으나 묵살당했다. ) 셋째,부서 간 의사소통 부재와 부서 이기주의다. (초기에 3군단장은 오마치 고개에 3군단 산하 대대병력을 배치했으나 자기 관할지역에서 부대를 철수시키라는 미 10군단장의 항의에 부대를 이동시켰다. 이후 10군단장은 이 고개를 무주공산 상태로 방치했다. ) 넷째,부서 책임자의 업무에 대한 책임감 및 위기대처 능력 부재다. (3군단장과 예하 사단장,지휘관들은 사즉생의 각오가 없었다. 3군단장은 현리에서 3,9사단장에게 포위망 돌파를 지시한 후 후방으로 현장을 이탈했으며,이후 지휘관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무질서한 후퇴로 막대한 인명 및 장비 손실을 초래했다. )

한국 전쟁사를 읽고 지난봄 속초 가는 길에 오마치 고개에 올라가 보았다. 60여년 전 그 함성과 총성은 세월 속에 묻혔지만 오마치 고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손영기 GS파워 사장(연세대 겸임교수) ykson@gspow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