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인터뷰] "3초 안에 판정… 정치인 다음으로 욕 많이 먹는 직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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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심판 이민호
150km 넘는 강속구, 뒤에서 보고 있으면 무서워요
오심했을땐 자괴감 들죠… 경기의 일부분으로 봐줬으면
'심판은 무조건 짬밥순'…경험에서 쌓은 냉정함 필요
150km 넘는 강속구, 뒤에서 보고 있으면 무서워요
오심했을땐 자괴감 들죠… 경기의 일부분으로 봐줬으면
'심판은 무조건 짬밥순'…경험에서 쌓은 냉정함 필요
삼성 라이온즈와 LG트윈스의 경기가 벌어진 7월28일 서울 잠실야구장.1루심을 맡은 한국야구위원회(KBO) 이민호 심판(39)이 그라운드에 들어서자 부지런히 몸을 풀고 있던 선수들이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를 건넨다.
캐치볼을 하고 있던 한 선수는 "공이 경기장 펜스에 그려져 있는 노란 선을 맞고 넘어가면 홈런인가요,안타인가요?"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이씨는 즉각 "그건 홈런"이라고 답해줬다.
심판은 '그라운드의 포청천'으로 불린다. 수도 없이 벌어지는 돌발 상황마다 대쪽 같은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심판은 시간에 쫓긴다. 경기의 맥을 끊지 않기 위해서는 빠른 판정이 필수다. 이씨는 "경기 중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한 판단을 3초 안에 정확하게 내려야 한다"며 "선수와 관중들이 심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경기를 매끄럽게 진행하는 게 심판의 미덕"이라고 말했다. 경기 시작 전에 이씨를 만났다.
▼야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
"초등학교 때 동네에서 중학생 형들이 야구를 하는 걸 봤어요. 조그만 공을 던지고 치는 게 정말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끼워 달라고 졸라서 형들 틈에서 야구를 시작했죠.하다 보니 재미 있어서 5학년 때 학교 야구부에 등록하면서 녹색 다이아몬드(야구장)와의 인연이 시작됐죠."
▼심판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대학 졸업 후 1993년에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의 전신)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죠.이종범 선수가 제 입단 동기예요. 저는 내야수였는데 1군 경기에는 못 나오고 2군 경기에만 주로 출전했어요. 4년 정도 뛰면서 2군에서는 남부리그 홈런상도 받을 정도로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무릎 통증이 심해져 은퇴했어요. 기왕 '야구밥'을 먹기 시작했으니 야구인생을 계속하자는 생각에 프로야구 심판시험을 보았고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죠."
▼은퇴할 때 아쉬웠을 것 같은데요.
"아쉽기보다는 홀가분한 기분이었습니다.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연습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운동신경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다른 선수들보다 몇 배는 더 해야 따라갈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밤새 방망이를 휘두르고 공을 던지며 연습에 매달렸죠.그 때문에 무릎이 더 일찍 상했는지도 모르지만요. 은퇴하니까 그런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오히려 홀가분했어요. "
▼10년 넘게 심판을 하고 계신데 직업으로서 선수와 심판을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시간을 되돌려 '너 선수할래,심판할래?' 하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들 것 같아요. 선수 때도 힘들었지만 심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정말 외롭고 힘든 일이에요. 특히 욕먹는 데에는 정말 '선수'죠.아마 정치인을 빼면 가장 많이 욕먹는 직업일 거예요. 다시 선택해야 한다면 심판도 선수도 아닌,그냥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 될 것 같아요. "
▼심판으로서의 보람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 사고 없이 경기가 끝나고 텅 빈 관람석을 볼 때 가장 뿌듯하죠.오심이나 판정 불복 없이 매끈하게 경기를 마무리하면 '오늘도 무사히 해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려요. 처음 심판이 됐을 때 선배들이 이렇게 충고했죠.'시합이 무사히 끝났다고 해도 만족하지는 못할 거야'라고요. 20년 넘게 심판 생활을 하신 분이 단 한 게임도 본인 스스로 만족스러운 경기는 없었다고 해요. 무사히 끝났지만 더 원활하게 경기를 진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죠."
▼심판의 포지션은 어떻게 정하나요.
"심판진은 5명이 한 팀이에요. 5명이 3루심,1루심,2루심,주심,대기심의 순으로 돌아가면서 심판을 봅니다. 대기심은 모니터를 분석하고 팀 상황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는 심판이죠.주심이 가장 힘들어요. 한 경기에서 양팀이 적어도 150개씩의 공을 던지는데 이 공이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계속 판단해야 하니까요. 수술로 치자면 집도의인 셈이라 심리적 부담도 큽니다. 그렇다고 누심이 편한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사고는 각 누에 있는 심판들이 많이 당하죠."
▼빠른 공이 날아올 땐 무서울 것 같은데요.
"공을 무서워하는 타자가 홈런을 못 치듯 공을 무서워하는 심판은 정확한 판정을 못 내립니다. 물론 150㎞가 넘는 강속구를 판정할 때면 무섭기는 해요. 하지만 견뎌내는 거죠.공에 맞으면 정말 아픕니다. 보호장구를 착용해도 가려지지 않는 부분은 무방비 상태거든요. 지금 제 몸에는 멍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심판들 중에는 목과 팔,쇄골 같은 데 금 간 사람들이 선수들 못지않게 많아요. "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2001년 롯데의 펠릭스 호세 선수가 삼성의 배영수 투수를 구타했던 경기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제가 1군 심판이 되고 나서 처음 주심을 맡은 날이었거든요. 호세 선수 앞 타자에게 투수가 애매한 빈볼을 던졌는데 제가 정확하게 제재를 못하고 어물쩍 넘어갔어요. 호세 선수한테도 빈볼이 날아갔지만 몸에 맞지는 않고 포볼로 걸어나갔죠.그런데 그 다음 타자에게도 빈볼이 날아가자 1루에 있던 호세 선수가 투수에게 뛰어가 구타를 한 겁니다. 그때 저는 주심이기는 했지만 뭐가 뭔지 모를 때라 정말 당황했죠.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요. 관중들도 김밥,물병 등을 그라운드 안으로 던지고 난리였죠.1루심이던 조종규 심판(현 심판위원장)이 재빨리 교통정리를 해 간신히 넘어갔어요. 처음 빈볼을 던졌을 때 경고를 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정말 아쉬웠어요. 그 경기가 끝난 뒤 심판을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
▼오심을 했을 땐 어떻습니까.
"자괴감이 들죠.그 어느 심판도 운동장에 오심하려고 서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아웃이나 세이프,파울 등의 판정은 번복할 수 없으니까 아주 신중하게 판단하려고 해요. 하지만 3초 내에 판정을 해야 하니까 어려워요. 설사 오심을 했다고 해도 그걸 계속 생각하면 안 돼요. 오심한 걸 자꾸 떠올리다 보면 또 다른 오심이 나올 수 있으니까 빨리 잊어버리고 마음을 추슬러야죠.1회에 오심이 나왔더라도 경기는 9회까지 해야 하니까요. "
▼오심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는 선수나 팬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물론 오심의 1차적 책임은 잘못 판단한 심판에게 있죠.하지만 가끔 판정을 지나치게 부각시킬 땐 아쉬운 생각이 들어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좀 달라요. 팬들은 심판의 판정을 보러 야구장에 오는 게 아니라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를 보러 오는 것이라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요. 오심도 경기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는 거죠.판정을 부각시키면 야구가 재미 없어져요. "
▼선수 · 감독과 사석에서 만나기도 합니까.
"절대 만나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운동했던 중 · 고교,대학 선 · 후배들도 경기장이나 단체로 보는 자리 외에는 사적으로 만나지 않아요. 한국 사람들은 정에 약하잖아요. 사적인 감정을 빨리 떨쳐버리지 않으면 심판 못해요. 지금은 현역에 남아 있는 친구들이 별로 없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많았어요. '친구인데 너무 하는 거 아니냐'는 원망도 들어야 했고요. 심판은 외로운 직업이에요. "
▼필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야구 심판이 갖춰야 할 가장 큰 덕목은 경험을 통해 쌓은 냉정함이에요. 다른 조직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30대에 이사도,CEO도 되지만 심판에게는 경험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30대 심판이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선배를 능가할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는 '심판은 무조건 짬밥순'이라고 해요. 묵은 장처럼 세월을 먹어야 경험이 생기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게임을 정확하면서도 부드럽게 운영할 수 있는 거죠." 이 심판은 "한 달 중 절반은 지방에서 산다"며 "언제나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아내와 아홉 살,일곱 살 된 딸들한테 미안하고 안쓰럽다"고 했다. 원정경기가 많아서 아빠가 나가야 하는 체육대회 같은 데도 못 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최장수 현역 심판으로 뛰고 싶다는 희망과 함께 남북이 같이 하는 통일 야구경기의 심판을 맡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박민제/강은구 기자 pmj53@hankyung.com
캐치볼을 하고 있던 한 선수는 "공이 경기장 펜스에 그려져 있는 노란 선을 맞고 넘어가면 홈런인가요,안타인가요?"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이씨는 즉각 "그건 홈런"이라고 답해줬다.
심판은 '그라운드의 포청천'으로 불린다. 수도 없이 벌어지는 돌발 상황마다 대쪽 같은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심판은 시간에 쫓긴다. 경기의 맥을 끊지 않기 위해서는 빠른 판정이 필수다. 이씨는 "경기 중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한 판단을 3초 안에 정확하게 내려야 한다"며 "선수와 관중들이 심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경기를 매끄럽게 진행하는 게 심판의 미덕"이라고 말했다. 경기 시작 전에 이씨를 만났다.
▼야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
"초등학교 때 동네에서 중학생 형들이 야구를 하는 걸 봤어요. 조그만 공을 던지고 치는 게 정말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끼워 달라고 졸라서 형들 틈에서 야구를 시작했죠.하다 보니 재미 있어서 5학년 때 학교 야구부에 등록하면서 녹색 다이아몬드(야구장)와의 인연이 시작됐죠."
▼심판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대학 졸업 후 1993년에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의 전신)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죠.이종범 선수가 제 입단 동기예요. 저는 내야수였는데 1군 경기에는 못 나오고 2군 경기에만 주로 출전했어요. 4년 정도 뛰면서 2군에서는 남부리그 홈런상도 받을 정도로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무릎 통증이 심해져 은퇴했어요. 기왕 '야구밥'을 먹기 시작했으니 야구인생을 계속하자는 생각에 프로야구 심판시험을 보았고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죠."
▼은퇴할 때 아쉬웠을 것 같은데요.
"아쉽기보다는 홀가분한 기분이었습니다.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연습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운동신경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다른 선수들보다 몇 배는 더 해야 따라갈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밤새 방망이를 휘두르고 공을 던지며 연습에 매달렸죠.그 때문에 무릎이 더 일찍 상했는지도 모르지만요. 은퇴하니까 그런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오히려 홀가분했어요. "
▼10년 넘게 심판을 하고 계신데 직업으로서 선수와 심판을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시간을 되돌려 '너 선수할래,심판할래?' 하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들 것 같아요. 선수 때도 힘들었지만 심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정말 외롭고 힘든 일이에요. 특히 욕먹는 데에는 정말 '선수'죠.아마 정치인을 빼면 가장 많이 욕먹는 직업일 거예요. 다시 선택해야 한다면 심판도 선수도 아닌,그냥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 될 것 같아요. "
▼심판으로서의 보람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 사고 없이 경기가 끝나고 텅 빈 관람석을 볼 때 가장 뿌듯하죠.오심이나 판정 불복 없이 매끈하게 경기를 마무리하면 '오늘도 무사히 해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려요. 처음 심판이 됐을 때 선배들이 이렇게 충고했죠.'시합이 무사히 끝났다고 해도 만족하지는 못할 거야'라고요. 20년 넘게 심판 생활을 하신 분이 단 한 게임도 본인 스스로 만족스러운 경기는 없었다고 해요. 무사히 끝났지만 더 원활하게 경기를 진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죠."
▼심판의 포지션은 어떻게 정하나요.
"심판진은 5명이 한 팀이에요. 5명이 3루심,1루심,2루심,주심,대기심의 순으로 돌아가면서 심판을 봅니다. 대기심은 모니터를 분석하고 팀 상황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는 심판이죠.주심이 가장 힘들어요. 한 경기에서 양팀이 적어도 150개씩의 공을 던지는데 이 공이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계속 판단해야 하니까요. 수술로 치자면 집도의인 셈이라 심리적 부담도 큽니다. 그렇다고 누심이 편한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사고는 각 누에 있는 심판들이 많이 당하죠."
▼빠른 공이 날아올 땐 무서울 것 같은데요.
"공을 무서워하는 타자가 홈런을 못 치듯 공을 무서워하는 심판은 정확한 판정을 못 내립니다. 물론 150㎞가 넘는 강속구를 판정할 때면 무섭기는 해요. 하지만 견뎌내는 거죠.공에 맞으면 정말 아픕니다. 보호장구를 착용해도 가려지지 않는 부분은 무방비 상태거든요. 지금 제 몸에는 멍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심판들 중에는 목과 팔,쇄골 같은 데 금 간 사람들이 선수들 못지않게 많아요. "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2001년 롯데의 펠릭스 호세 선수가 삼성의 배영수 투수를 구타했던 경기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제가 1군 심판이 되고 나서 처음 주심을 맡은 날이었거든요. 호세 선수 앞 타자에게 투수가 애매한 빈볼을 던졌는데 제가 정확하게 제재를 못하고 어물쩍 넘어갔어요. 호세 선수한테도 빈볼이 날아갔지만 몸에 맞지는 않고 포볼로 걸어나갔죠.그런데 그 다음 타자에게도 빈볼이 날아가자 1루에 있던 호세 선수가 투수에게 뛰어가 구타를 한 겁니다. 그때 저는 주심이기는 했지만 뭐가 뭔지 모를 때라 정말 당황했죠.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요. 관중들도 김밥,물병 등을 그라운드 안으로 던지고 난리였죠.1루심이던 조종규 심판(현 심판위원장)이 재빨리 교통정리를 해 간신히 넘어갔어요. 처음 빈볼을 던졌을 때 경고를 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정말 아쉬웠어요. 그 경기가 끝난 뒤 심판을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
▼오심을 했을 땐 어떻습니까.
"자괴감이 들죠.그 어느 심판도 운동장에 오심하려고 서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아웃이나 세이프,파울 등의 판정은 번복할 수 없으니까 아주 신중하게 판단하려고 해요. 하지만 3초 내에 판정을 해야 하니까 어려워요. 설사 오심을 했다고 해도 그걸 계속 생각하면 안 돼요. 오심한 걸 자꾸 떠올리다 보면 또 다른 오심이 나올 수 있으니까 빨리 잊어버리고 마음을 추슬러야죠.1회에 오심이 나왔더라도 경기는 9회까지 해야 하니까요. "
▼오심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는 선수나 팬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물론 오심의 1차적 책임은 잘못 판단한 심판에게 있죠.하지만 가끔 판정을 지나치게 부각시킬 땐 아쉬운 생각이 들어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좀 달라요. 팬들은 심판의 판정을 보러 야구장에 오는 게 아니라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를 보러 오는 것이라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요. 오심도 경기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는 거죠.판정을 부각시키면 야구가 재미 없어져요. "
▼선수 · 감독과 사석에서 만나기도 합니까.
"절대 만나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운동했던 중 · 고교,대학 선 · 후배들도 경기장이나 단체로 보는 자리 외에는 사적으로 만나지 않아요. 한국 사람들은 정에 약하잖아요. 사적인 감정을 빨리 떨쳐버리지 않으면 심판 못해요. 지금은 현역에 남아 있는 친구들이 별로 없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많았어요. '친구인데 너무 하는 거 아니냐'는 원망도 들어야 했고요. 심판은 외로운 직업이에요. "
▼필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야구 심판이 갖춰야 할 가장 큰 덕목은 경험을 통해 쌓은 냉정함이에요. 다른 조직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30대에 이사도,CEO도 되지만 심판에게는 경험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30대 심판이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선배를 능가할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는 '심판은 무조건 짬밥순'이라고 해요. 묵은 장처럼 세월을 먹어야 경험이 생기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게임을 정확하면서도 부드럽게 운영할 수 있는 거죠." 이 심판은 "한 달 중 절반은 지방에서 산다"며 "언제나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아내와 아홉 살,일곱 살 된 딸들한테 미안하고 안쓰럽다"고 했다. 원정경기가 많아서 아빠가 나가야 하는 체육대회 같은 데도 못 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최장수 현역 심판으로 뛰고 싶다는 희망과 함께 남북이 같이 하는 통일 야구경기의 심판을 맡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박민제/강은구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