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먹고 장만했으나 뽀얗게 먼지가 앉은 채 방 구석에서 집기로 전락한 큼직한 여행가방이 유난히 애처롭다. 어서 먼지를 떨어내고 그 안에 옷을 차곡차곡 챙겨넣은 다음,공항으로 가 가방에도 외국물(?)을 좀 먹여야 할텐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시간도 돈도 없는 처지인지라 다음 기회를 기약해 보려해도,한번 단단히 바람든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은 큰 여행가방이 활약할 때가 아닌 듯해서,대신 작은 손가방에 카메라를 챙겨넣고 가볍게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여권이 없어도 해외여행을 나선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서울 근교 이국적인 명소를 찾아서.

◆쁘띠프랑스

경기도 가평군 쁘띠프랑스(www.pfcamp.com)에 들어서면 지중해 근처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을 방문한 기분이 든다. '한국 안의 작은 프랑스'를 표방하는 이곳은 대충 카메라를 들이대도 예쁜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장소로 이름났다. 그래서인지 부지런히 사진찍는 관람객들이 많아,본의 아니게 그들의 기념사진 속 배경으로 자주 찬조출연할 위험(?)을 조금은 감수해야 한다.

먼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을 찾았다. 주옥같은 구절이 가득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어린왕자와 여우 등이 있는 곳이다. 새삼 《어린 왕자》의 감흥이 새록새록하다면 쁘띠프랑스 내 '생텍쥐페리' 기념관에 꼭 들러야 한다.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건 바로 생텍쥐페리의 손길이 남아있는 편지와 스케치다. 어린 왕자를 펜으로 그린 스케치,소혹성에 앉아있는 어린 왕자에 채색까지 한 그림을 특히 눈여겨보자.진품이란다.

150년 전 프랑스 고택을 그대로 재현한 '프랑스전통주택관'은 의자,침대 등 가구뿐 아니라 기둥,기와,바닥,창까지 프랑스에서 공수해 왔다고 한다. 화장실 변기까지 재현했다. 까칠한 '강마에'(김명민 분) 캐릭터로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촬영지도 눈길을 사로 잡으며,한층 더 올라가면 마을 전경을 즐기면서 쉴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전망대에서는 쁘띠프랑스 전체와 푸르른 청평호수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하루에 네 번 연주되는 오래된 대형 오르간의 주옥같은 멜로디도 놓치지 말자.

한가지 더,쁘띠프랑스 건물 곳곳에는 예쁜 창살이 있는 창이 많다.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풍경은 그대로 여행엽서 한 장이 되니 창 앞에서는 잠시 여유를.



◆중남미문화원

우리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중남미는 가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중남미 여행은 '로망'으로만 남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몸서리 치게 긴 비행시간을 감수하는 대신 차를 타고 가까운 경기도 고양시 중남미문화원(www.latina.or.kr)으로 향했다.

30년 외교관 생활을 아르헨티나,멕시코 등 중남미에서 주로 보낸 이복형 전 대사와 부인 홍갑표 여사가 '문화는 나눔이지 소유가 아니다'란 생각으로 설립한 중남미문화원에는 대사 부부가 중남미에서 모은 이국적 물품이 가득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돈키호테 상과 검은 피부에 연푸른 옷을 걸친 아름다운 여인 조각상이 입을 모아 "중남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말을 거는 듯했다.

여인을 뒤로 하고 일단 박물관에 입장하면 BC 100년부터 기원 후 1400년까지 제작된 다양한 인디오 토기를 만날 수 있다. 토기들은 중남미 인디오의 소박한 멋을 드러낸다. 종교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레타브로(성당제단) 가운데 자리잡은 과달루페 성모를 유심히 보자.인디오 전통 문화와 유럽 가톨릭 문화가 어떻게 중남미에서 융합됐는지 한눈에 느낄 수 있다. 레타브로를 지나면 좀 꼬질꼬질한(?) 주머니가 있는데,중남미 고지대에서 추위를 견디기 위해 씹은 환각제를 넣고 다니던 주머니라니 갑자기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박물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독특한 가면들이 벽에 즐비하게 걸려있는 전시실이다. 얼굴이 여러개 있는 가면,게와 물고기 모양 가면,비취로 만든 가면 등이 서양의 가면이나 우리의 탈과는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박물관 건너편 미술관에는 중남미 작가들의 미술작품이 전시돼 있고 기하학적 문양에 현란한 색채를 지닌 인디오들의 수공예 작품도 벽에 걸려 있다.

중남미문화원의 아기자기한 매력을 놓치지 않으려면 구석구석 유심히 봐야 한다. 독특하게 조각된 박물관의 문도 멕시코에서 직접 주문하거나 구입해 온 중남미산이라니 막 밀어 젖히기엔 미안해졌다. 장식처럼 무심하게 놓여 있는 도자기도 한참 눈길을 붙잡는다.

중남미 여행 기분을 한껏 내려면 중남미 14개국에서 온 조각작품이 모인 조각공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문이 있는 공원을 한가롭게 한참 거닐다 보면 운동부족으로 그동안 푹 쉬었던 다리가 아파질 터,지구 반바퀴를 돌아 우리 앞에 선 중남미의 흔적을 바라보며 예쁜 벤치에 걸터앉아 여독을 푸는 여행자 흉내를 내보자.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찾아가는 길

▶쁘띠프랑스의 토요일 개장시간(3~11월)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평일과 일요일 오후 6시)다. 입장료는 성인 8000원,청소년 6000원,어린이 5000원.청량리역이나 성북역에서 춘천행 기차를 타고 청평역에 내려 셔틀버스를 이용하거나,동서울버스터미널 또는 상봉터미널에서 청평행 버스를 타고 청평터미널에서 내려 5분 거리에 있는 청평역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된다.

자가용 운전자는 46번 경춘국도를 타면 청평댐 삼거리에서 호명리 방면으로 우회전해 청평댐에서 10㎞ 직진하면 된다. (031)584-8200

▶중남미문화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4~10월)까지 연다. 입장료는 성인 4500원,군인과 학생 3500원,12세 이하 3000원.지하철 3호선 삼송역 5번 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거나 통일로 방면에서 333,330,703번을 타고 고양동 시장 앞에서 하차해 10~15분 정도 걸으면 문화원이 나온다.

자가용 운전자는 자유로를 타고 통일로 IC에서 문산방향으로 2㎞ 정도 가 필리핀참전비 앞 신호에서 우회전해 65번 국도로 2㎞ 오면 좌측에 문화원을 만날 수 있다. 의정부에서 송추 · 장흥 방향으로 나와 5㎞ 직진하다가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하거나,구파발에서 1번국도를 타고 필리핀참전비 앞 신호에서 우회전해도 된다. 중남미 음식 빠에야를 맛보려면 미리 예약해야 한다(월~토요일).(031)962-7171,9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