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차이 속의 평등이, 평등 속의 차이가 있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사실 평등과 차이는 시이소의 양끝과 같다. 한 쪽을 가벼이 하면 기울어 떨어지기 마련이다. 차이 속에는 엄연히 잊지 말아야할 인간적 평등이 있다. 차이를 잘 살피면 오히려 등평할 수 있다.
언젠가 정년퇴임한 어떤 분이 인생은 참 허무하다고 넋두리했다. 그는 전직 대기업 임원이었다. 잘 알다시피, 대기업에서 정년까지 살아남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만큼 어렵다.
회사에서는 퇴임식자리에서 공로패를 수여하며 그 공로를 치하하고 전 직원들의 표상이라고 박수를 쳤고 그는 명예로운 퇴직을 했다. 퇴임 후 회사에 볼일이 있어 정문을 걸어 들어가다가 정문 경비원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퇴임 전에 매일 관용차로 회사정문을 드나들 때는 정문 경비원들이 직각으로 허리 굽혀 큰소리로 인사를 하더니, 퇴직하자 하루아침에 누구냐며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아니, 나를 몰라보는 것이요?”
그랬다. 정문 경비원들은 매일 자동차에 인사를 한 것이지 자신에게 인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관리인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검은 승용차 뒷좌석에서 얼굴도 내밀지 않을 정도로 윗사람 격식을 차리며 아랫사람을 차별했던 그 분의 처신의 결과였다.
차이와 차별은 다르다. 차이를 알면 차별하지 않고 차이에 맞는 평등을 연출할 수 있다.
지인 중에 한 명이 잘 아는 음식집이 있다며 저를 초대한 적이 있었다. 일행은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지인은 한 사람에게 감사의 표시를 빠뜨렸던 것. 조금 전 땀 흘리며 음식을 나르던 종업원에게 사례가 없었던 것이다.
지인이 생각하기엔 식대를 지불하므로 써 모든 계산이 끝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과 종업원이란 타이틀만 생각한 처사였다. 사람 대 사람으로 평등하게 대했다면 사례방법과 금액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빼먹지는 않았을 터이기에 못내 아쉬웠다. ‘차이’를 제대로 두지 않아, 본의 아니게 사람 ‘차별’을 하고 만 것이다.
‘차이’는 ‘존재’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른 사실처럼, 전생부터 쌓여온 업보가 다르므로 현생의 사람마다 능력과 복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현실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노력하면 미래를 바꿀수 있다.).
차이 때문에 인간은 무한히 진화할 수 있다. 그래서 차이를 무시한 획일적 평등은 차별만큼이나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차이 속에 평등이 있고, 평등 속에 차이가 있다.
☞ 차길진 칼럼 더 보기
언젠가 정년퇴임한 어떤 분이 인생은 참 허무하다고 넋두리했다. 그는 전직 대기업 임원이었다. 잘 알다시피, 대기업에서 정년까지 살아남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만큼 어렵다.
회사에서는 퇴임식자리에서 공로패를 수여하며 그 공로를 치하하고 전 직원들의 표상이라고 박수를 쳤고 그는 명예로운 퇴직을 했다. 퇴임 후 회사에 볼일이 있어 정문을 걸어 들어가다가 정문 경비원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퇴임 전에 매일 관용차로 회사정문을 드나들 때는 정문 경비원들이 직각으로 허리 굽혀 큰소리로 인사를 하더니, 퇴직하자 하루아침에 누구냐며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아니, 나를 몰라보는 것이요?”
그랬다. 정문 경비원들은 매일 자동차에 인사를 한 것이지 자신에게 인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관리인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검은 승용차 뒷좌석에서 얼굴도 내밀지 않을 정도로 윗사람 격식을 차리며 아랫사람을 차별했던 그 분의 처신의 결과였다.
차이와 차별은 다르다. 차이를 알면 차별하지 않고 차이에 맞는 평등을 연출할 수 있다.
지인 중에 한 명이 잘 아는 음식집이 있다며 저를 초대한 적이 있었다. 일행은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지인은 한 사람에게 감사의 표시를 빠뜨렸던 것. 조금 전 땀 흘리며 음식을 나르던 종업원에게 사례가 없었던 것이다.
지인이 생각하기엔 식대를 지불하므로 써 모든 계산이 끝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과 종업원이란 타이틀만 생각한 처사였다. 사람 대 사람으로 평등하게 대했다면 사례방법과 금액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빼먹지는 않았을 터이기에 못내 아쉬웠다. ‘차이’를 제대로 두지 않아, 본의 아니게 사람 ‘차별’을 하고 만 것이다.
‘차이’는 ‘존재’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른 사실처럼, 전생부터 쌓여온 업보가 다르므로 현생의 사람마다 능력과 복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현실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노력하면 미래를 바꿀수 있다.).
차이 때문에 인간은 무한히 진화할 수 있다. 그래서 차이를 무시한 획일적 평등은 차별만큼이나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차이 속에 평등이 있고, 평등 속에 차이가 있다.
☞ 차길진 칼럼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