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기자실. 한국거래소는 100명이 넘는 상주기자들에게 '2009년도 상반기 불공정거래 적발 건수 크게 증가'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5일 조간 엠바고(보도유예 요청)를 걸어 배포했다.

내용은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가 올해 상반기 상장회사의 불공정거래를 조사한 결과, 적발 건수가 16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9% 늘었다는 것이다.

5일 조간 엠바고란 신문에 적용된다. 실시간 뉴스를 전달하는 인터넷 미디어의 경우에는 4일 정오 이후가 보도시점이 된다. 따라서 인터넷 미디어들은 상장회사들의 현황을 보여주는 한국거래소의 보도자료를 이날 낮 12시에 맞춰 인터넷에 게재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장이 끝난 뒤, 한국거래소 직원들이 황급해졌다. 부리나케 정정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전에 배포된 보도자료의 제목을 '2009년도 상반기 불공정거래 혐의통보 건수 크게 증가'로 바꾸고, 본문의 '적발'이라는 단어 도 '혐의'로 바꿔주기를 기자들에게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장회사들이 169건의 불공정거래를 저질렀다고 알려진 뒤였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이번 조사는 시장감시위원회가 상장법인의 불공정거래 혐의 여부를 포착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통보한 건수를 집계한 것"이라며 "'적발'이라는 단어보다는 '혐의'라는 단어가 더 정확한 것 같아 정정 자료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불공정거래 혐의는 법원의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개연성이 있는 사실에 불과하다"며 "적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현재의 시장 상황을 정확히 반영할 수 없다"고 시인했다.

또 "한국거래소가 불공정거래 혐의통보 건수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단어 선택에 있어 혼선이 온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한국거래소도 변명할 말은 많을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하거나 이른바 '작전'(시세조종)을 일삼는 사례가 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공개, 시장에 경종을 울리려는 거래소의 의지도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공공기관인 한국거래소가 검찰이나 사법부에서 일반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피의자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을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법무법인에 소속된 한 변호사는 "'혐의'는 불공정거래에 대한 정황이 포착됐다는 것이며, '적발'은 불공정거래 사실 자체를 확인했다는 것으로 의미가 엄연히 다르다"며 "단어 하나의 차이로 인해 기업과 주주들의 이익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여전히 일부 기사들이 '혐의'가 '적발'로 표기된 채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거래소 측은 정정 보도자료 하나로 이번 일을 모두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투자자들에게 상장회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는 사안을 한국거래소는 적극적으로 수습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증권업계에서는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한국거래소에서 단어 하나 제대로 모르고 쓰면 되겠냐"는 비아냥 거리는 소리도 나온다. 공공기관으로 격상된 한국거래소가 이번에 '적발'과 '혐의'를 헷갈린 것 처럼 또다른 무사안일에 빠질까 우려되는 대목이다.

한경닷컴 한민수 기자 h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