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더라 통신'이란 말이 있다.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이 말은 유언비어를 가리키는 속어다.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었을 때일수록 '카더라 통신'은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사회의 항상적인 현상이다. 6 · 25 때 처음 우리 상공에 등장한 제트기(機)를 '쌕쌕이'라고 했다. 소리는 요란하게 나는데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소리 나는 곳에서 훨씬 앞쪽으로 비행기가 보였다. 그때의 공포 섞인 놀라움은 경험자가 아니면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이 쌕쌕이는 또 '호주비행기'라 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고국인 호주에서 특별히 우리 상공에 파견한 비행기라 해서 그리 부른 것이다. 이 대통령의 부인은 본시 오스트리아 태생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잘못 알고 호주 비행기라 한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황당한 근거에서 나온 당시의 '카더라 통신'을 어떤 쪽에서 유포시켰는지는 알 수 없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널리 유포된 것만은 확실하다. 신동엽의<금강> 끝자락에도 이런 대목이 보인다.

'제트기의 폭음 /그때 우리들은 그걸 /호주기라 불렀지/오스트레일리아 산(産)이라던가. '

그때그때 수시로 유포된 '카더라 통신'은 뒷날에 돌아보면 황당한 것도 있고 사실에 근접한 경우도 있고 사실에 부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황당하거나 과장된 것이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향가 '서동요'에서 보듯이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일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고의로 유포시킨 경우도 적지 않다. 어쨌거나 유언비어가 난무하지 않는 사회가 건강하고 밝은 열린 사회일 것이다.

'카더라 통신'과는 다르지만 맞지 않는 얘기가 퍼지는 경우도 있다. '카더라 학설'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오해나 호사벽(好事癖)에서 나왔지만 언뜻 보아 그럴 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어 널리 수용되는 얘기도 많다. 가령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로 시작되는 시조가 정몽주 모친의 작품이라든가 임진란 때 신립(申砬)이 스스로 조령관문을 버렸다던가 하는 얘기는 아직도 유포되고 있다.

흔히 듣게 되는 '카더라 학설'에는 우리의 일상적 어법과 연관되는 것도 있다. 해방 이전의 문화적 생산 가운데 가장 널리 수용된 것은 김소월 시와 홍난파 가곡일 것이다.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치고 김소월 시편이나 홍난파 가곡 한두 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제 말기 학교에서 밤낮 군가나 부르다가 해방이 되어 홍난파의 가곡을 처음으로 배웠을 때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으로 비쳤다. 가슴 설레는 행복의 약속으로 다가왔다. 이원수 작사인 '고향의 봄'도 그 중의 하나였다

사람들은 어릴적에 접한 풍경이나 음식이나 책이나 노래에 평생 끌린다. 그런 탓이기도 하겠지만 '고향의 봄'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곧잘 화제에 오른다. 그 가운데 곡은 좋지만 노랫말의 내용이 동요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란 대목은 고향 떠난 어른들에게나 어울리지 어린이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랫말 비판에서 가장 신랄한 것은 어법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내가 살던 고향이지 나의 살던 고향이 뭐냐" "이것은 일본어의 어법을 모방하거나 잘못 추종한 것 아니냐"며 사납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듣게 되면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가 된다. 일본어에 유사한 어법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어의 추종이라는 카더라 학설이 생겨난 것이리라.

그렇지만 중세(15세기)국어에서는 현대국어와는 반대로 주격조사 '-이'보다 관형격조사 '-의'가 더 일반적으로 쓰였다. 즉 '나의 살던 고향'은 아주 우리말다운 어엿한 우리말 어법이다. 뿐만 아니라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더 많이 쓰였다. 우리 말 어휘를 가장 풍부하게 그리고 바르게 구사했다고 평가받는 작가가 붙인 표제에 '나의 존경하는 작가 톨스토이'라는 것도 있다. 그게 훨씬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 때문일 것이다.

이산 김광섭은 흔히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해방 직후에 발표한 애국시편들도 당대의 일반적 수준에서 본다면 뛰어난 작품이다. 1947년에 발표한 김광섭의 애국시편 가운데 '나의 사랑하는 나라'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행에서는 표제와 다르게 쓰고 있다는 것이다.

'지상(地上)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러라.'

시인은 우리말 어법에 맞게 두 갈래로 쓴 것이다. 요즘 우리 사이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나라'로 쓰는 것이 보통이고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해방 이전부터 글을 써온 시인에게는 '나의 사랑하는 나라'도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표제와 시행을 다르게 쓴 것이리라.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어의 구문(構文)투가 우리 문장에 많이 들어왔다. 그것은 치밀하고 논리적인 글쓰기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거기에 익숙해진 세대에겐 '나의 살던 고향'은 얼마쯤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말의 정통적 어법이다.

유종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