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뭐하세요? 외조를 잘 해주지요?"

국회에 들어오기 전,여성경제인협회의 운영위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운영위원들과 워크숍을 갔다가 얘기를 나누던 중 남편 이야기가 나왔다. '현모양처의 직무는 상당 부분 유기하고 있는 나를 싫은 내색 않고 잘 참아주는 좋은 남편'이라는 취지로 답을 했던 것 같다. 건너편에 있던 한 여성 기업인 한분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남편 자랑도 내놓고 하고,참 좋은 세상이네.난 예전에 과부인 척하고 다녔는데…. 남편 있다고 하면 누가 일을 주겠어.남편 없는 불쌍한 행색을 해야 마지못해 일을 주고 그랬지…."

거래선을 뚫기 위해 멀쩡하게 잘 있는 남편마저도 없다 해야 했던 그 분의 말이 가슴 짠했다. 내가 국회에 들어오게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도 일하는 여성들이 겪었던 고생을,우리 후배들은 좀 덜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여성경제인의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늘 고민이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만났다. 일전에 피터 드러커의 수제자였다는 수잔 배리 여사를 만나면서였다. 수잔 배리는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지난 부시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정파에 무관하게 여성기업 지원을 위한 대통령 자문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왔던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였다. 수십년 동안 쌓아왔던 여성기업 육성에 관한 미국의 노하우는 의외로 간단했다. 여성기업인이 단결하면 힘 있는 '수요자'로서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국회와 중소기업청은 여성기업인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할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이 경영하는 기업의 수요와 구매 행태를 조사하니,여성기업은 의료보험,전산장비,통신,기타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고객임이 밝혀졌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미국 여성기업인연합회는 그 분야의 대기업에 여성기업 제품을 일정 비율 이상 구매해 줄 것을 요구했다. 몇몇 대기업이 이에 동참함으로써 이 운동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연방정부 조달 예산의 5%는 여성기업 제품을 구매하도록 권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더 나아가 여성 기업으로부터의 구매 비율이 전체 기업 구매의 8%가 넘지 않으면 영업 허가를 내주지 않거나 갱신하지 못하게 하는 주정부도 상당수 생겼다.

우리나라 전체 기업의 28%가 여성기업이고,여성기업에서 일하는 사람 수가 전체 기업 종사자의 40%가 넘는다. 하지만 하나같이 판로 개척이나 자금 조달에 애로를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여성기업인의 애처로운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맘 착한 거래상대에 기업의 운명을 맡기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을까?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도 식구 같은 직원들 끌어안고 함께 고생하는 여성기업인들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구석구석을 살아 숨쉬게 하는 모세혈관이다. 이 모세혈관이 튼튼해야 온몸에 온기가 흐른다. 집안 살림,회사 살림에 녹초가 된 이들의 무거운 짐,조금씩 함께 들어주면 좋겠다.

조윤선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