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미국 로키산맥 산자락에 자리 잡은 콜로라도주 볼더 시.제이슨 존슨씨(48)의 단독주택에 들어서니 벽 한 쪽에 붙어 있는 계량기가 눈에 띈다. 얼핏 보면 여느 계량기와 비슷하다. 자세히 보니 숫자판이 많다. 주택 내 전기량을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스마트 미터기'다.

스마트 미터기는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에 쓰이는 필수 제품이다. 스마트그리드란 기존 전력망에 첨단 정보과학(IT) 기술을 접목,전력 공급자와 소비자가 양 방향으로 정보를 교환해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는 시스템이다. 녹색 바람이 불면서 스마트그리드 구축 경쟁도 뜨겁다. 볼더 시는 세계 최초로 작년 3월부터 시범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 등도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최근 열린 G8(주요 8개국) 확대정상회담에서 스마트그리드 분야 선도 국가로 선정된 한국도 제주도에 실증 단지를 설치해 스마트그리드를 선도한다는 계획이다.

스마트그리드 시범 도시 1호 미국 볼더시

볼더 시가 스마트그리드 시범 사업을 시작한 것은 작년 3월.전력 전문업체인 엑셀에너지와 함께 1만5000세대에 스마트 미터기를 무료로 설치하면서부터다. 스마트 미터기는 각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기량을 실시간으로 체크한다. 언제 전기를 많이 쓰고 적게 쓰는지 알 수 있다. 어떤 가전제품이 언제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볼더 시의 스마트그리드는 아직 초보 단계다. 각 가정의 실시간 전기 사용량 등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 불과하다. 그렇지만 1년6개월에 걸쳐 수집된 자료만으로도 큰 자산이다. 이를 통해 전력 공급량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서다. 지금까지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공급량만 조절해도 5%가량의 전기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게 볼더 시의 설명이다.

볼더 시는 이에 힘입어 스마트그리드를 상용화할 계획이다. 카렌 멀츠 볼더시 환경담당 시장보좌관은 "지금까지 시범사업 성격으로 진행하던 스마트그리드 시티 프로그램을 오는 10~11월께 본격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각 가정도 순차적으로 에너지 효율화 가정으로 개조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각 가정은 전력 소모를 최소화하는 온도조절 장치를 갖추게 된다. 필요 없는 가전제품의 전력 소모도 자동적으로 줄이게 된다. 태양광 집진시설이 갖춰지고 전기차 충전시설도 마련된다.

볼더 시는 궁극적으로 전기요금을 실시간제로 전환할 계획이다. 전기 사용량이 많을 때는 요금을 비싸게 하고,적을 때는 요금을 싸게 해 전기 사용을 억제한다는 방침이다.

비단 볼더 시만이 아니다. 미국은 2003년 '그리드2030(Grid2030)'을 마련해 스마트그리드 전략에 착수했다. 2030년까지 스마트그리드를 전국에 상용화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겠다는 의지다. 이에 발맞춰 엑셀에너지 등 전력회사는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IBM GE 월풀 등 미국의 간판 기업들도 경쟁적으로 스마트그리드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대표 도시에 도전하는 제주도 구좌읍

스마트그리드를 구축하려면 기존 전력망에 통신망을 더하는 IT가 필수적이다. IT 강국인 한국이 유리한 조건이다. 미국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은 스마트그리드를 완벽히 구현한 실증 단지를 2013년까지 1260억원을 들여 제주도 구좌읍에 짓기로 했다. 미국 볼더 시가 맛보기 스마트그리드 도시에 불과하다면,제주도는 스마트그리드 도시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제주도 실증 단지에는 스마트 계량기는 물론 송 · 배전 시스템,포털 시스템,전력선 통신을 이용한 냉공조 시스템,에너지 효율장치 등이 포괄적으로 설치된다. 스마트 계량기는 △실시간 전기 사용량 △요금 △해당월 전기요금 추정치 △이웃집의 전기 사용량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이 시스템만으로도 볼더 시의 스마트그리드를 뛰어넘는다. 한전은 한발 더 나아가 신 · 재생 에너지까지 결합시킬 방침이다. 구좌읍 인근에 있는 3곳의 풍력발전 단지에서 생산하는 전력을 끌어올 계획이다. 가정마다 태양광 발전설비를 설치,잉여 전력을 한전에 판매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2011년까지 구좌읍을 비롯 제주 전역에 전기자동차용 충전소 5곳도 설치하기로 했다. 관광지인 제주 지역의 특성을 살려 택시와 렌터 카를 중심으로 한 전기자동차도 우선 보급키로 했다. 실시간 전기요금제를 도입해 요금이 가장 싼 시간대에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구좌읍에서 최소 22%의 전기를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국적으론 실시간 요금제만 적용하면 전기 사용량이 연간 6%(1조8000억원) 감소할 것이란 게 정부의 전망이다. 한국은 이를 바탕으로 2030년 2조9880억달러로 추정(국제에너지기구 · IEA)되는 관련 시장의 30%를 장악한다는 계획이다.

일본 · EU도 상용화 시도 중

전력 체계를 바꾸는 것만으로 전기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매력이다. 태양광 풍력 연료전지 등 신 · 재생 에너지까지 가미하면 금상첨화다. 그러다 보니 미국 한국 외의 나라도 스마트그리드 구축에 심혈을 쏟고 있다.

일본은 에너지 기술혁신 계획인 '쿨 어스(Cool Earth)' 프로그램을 통해 스마트그리드를 구축하고 있다. 일부 신 · 재생 에너지 시범 마을에서는 스마트그리드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중앙집중형 태양광 마을인 군마현 팰타운이 대표적이다. 이 마을의 가정에는 계량기가 세 개씩 달려 있다. 하나는 전력회사에서 전기를 얼마나 사왔는지 나타낸다. 다른 하나는 태양광으로 만든 전기를 전력회사에 얼마나 팔고 있는지를 기록한다. 나머지 하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얼마나 줄였는지 알려 준다. 각 가정에서 전기를 언제 얼마나 쓰는지는 별도의 모니터를 통해 알 수 있다. 세 가지 계량기를 합친 게 스마트 미터기다. 계량기가 분산돼 있지만 이미 스마트그리드 시스템을 갖춘 셈이다.

유럽연합(EU)은 2006년 '스마트그리드 비전'을 발표하면서 상용화 작업에 착수했다. EU 회원국들은 작년까지 스마트그리드 보급을 위한 관련 법안을 완성했다. 이를 토대로 독일과 프랑스 등에선 시범 도시를 통해 스마트그리드 구축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구자균 LS산전 사장은 "스마트그리드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전선업뿐만 아니라 IT · 에너지 · 건설 · 자동차 산업 등이 결합해야 한다"며 "스마트그리드는 우리 경제의 새로운 먹을거리"라고 말했다.

볼더(미국)=김동욱/이정호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