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代議)민주주의는 국민이 대표를 선출하고 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국민이 통치하는 정치제도로서 적합해보이지만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대의제 정치제도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이 고안됐는데,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성격이 강한 주민소환이나 주민발의가 대표적인 방안이다.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선출된 정치대표자들의 권한에 대한 오래된 논쟁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정치적 대표자는 수탁자(trustee)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정책결정을 위해서는 많은 정보와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데,일반대중이 그러한 역량을 갖추기는 어렵다. 따라서 대표자는 정책결정에 자율성을 갖고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다른 일군의 학자들은 국민의 대표는 대리인(delegate)의 역할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대표자의 의사와 유권자의 의사가 다르다면 대표자는 심부름꾼의 역할에 그쳐야 하며,자신의 견해를 내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가 정책결정에 반영돼야 하는 것이며,대의제 민주주의는 단순히 제도운영의 편의를 위해 대표자를 선출하고 역할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는 26일 치러질 제주도지사의 주민소환투표 소식을 접하면서 이 제도의 기본취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제도가 성공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의 의미를 보자.대통령이 법률안 거부권(veto)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국회가 대통령의 권한을 의식해 법률안 심사에서 대통령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 자체가 거부권이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만일 대통령이 실제로 거부권을 행사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는 이미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므로 정치는 실패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주민소환제도가 대표자들의 권한남용을 막기 위한 장치라면,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작동한다는 건 역설적으로 이 제도가 사용되지 않는 경우다. 지방자치에서 대표자들을 소환하는 게 아니라,소환제도가 있음으로써 대표자들이 독단적인 행정을 펼치지 못하도록 사전에 억제기능을 할 때 비로소 주민소환제는 성공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따라서 주민소환제의 활성화는 직접민주정치의 제고가 아니라 민주정치의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행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이 내재하고 있는 문제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법률 제7조는 소환투표를 청구하기 위한 조건을 규정하고 있는데,그 내용은 단지 소원청구권자의 숫자만을 규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소환대상 행위가 언급돼있지 않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 대표들의 모든 행위가 소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표자의 권한남용이나 부적절한 정책결정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것은 대표자의 정당한 권한행사에 대한 보호조치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과도한 소환대상의 문제는 소환제도가 정쟁에 남용될 우려를 갖게 한다.

하남시장이나 제주도지사의 주민소환은 모두 기피시설 유치에 따른 것이다. 지역발전과 환경유지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추구에 대한 주민의 불만이 주민소환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탁자로서의 대표자 권한은 인정되지 못한 것이다.

주민소환의 사례로 가장 잘 알려진 건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사례일 게다. 당시 주정부 재정부실로 주민소환을 당한 기존 주지사와 맞붙어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당선된 것.그러나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도 성공한 주민소환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사례가 역사상 두 번째일 정도로 드물었다. 그만큼 발의 및 선거결과 확정까지는 엄격한 절차가 있다는 것이다. 주민소환은 탄핵의 다른 형태라는 점에서 보다 엄격한 규정들이 필요하다.

이현우 <서강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