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합병(M&A)으로 한 시절을 주름잡던 기업들이 휘청거리고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작년 하반기 몰아닥친 세계적 금융위기로 돈이 씨가 말라버리면서 생긴 현상이다. 돈을 빌려 M&A에 나선 것이 부담이 돼 유동성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진행되는 기업 구조조정 타깃도 이들 기업이다.

하지만 이런 유동성 풍랑에도 예외적인 국내 기업이 하나 있다. 바로 STX그룹이다. STX는 2001년 쌍용중공업을 인수해 사업을 시작한 후 불과 7년여 만에 재계 19위(2008년말 자산기준)로 올라설 만큼 초고속 성장을 해왔다. 주요 수단은 M&A였다.

하지만 여타기업과 달리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바 '출구전략(exit strategy)' 또는 '회수계획(exit plan)'이 그 비결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3년 내에 투자비 회수가 가능한 기업을 골라서 인수한 전략이 적중했다는 얘기다.

◆5000억원 투자,2조원 회수


2001년 쌍용중공업을 모태로 출발한 STX는 그해 법정관리 중이던 대동조선(현 STX조선해양)을 인수하며 재계에 존재를 알렸다. 이듬해에는 산단에너지(STX에너지)를 사들이며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2004년에는 수십년간 법정관리 상태에 있던 해운업체인 범양상선(STX팬오션)을 인수함으로써 M&A업계에 강자로 부상했다. 이어 2007년에는 노르웨이 아커야즈 지분 39.2%를 사들이며 그룹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1년 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자 M&A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기업들이 '좀 위험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았다. STX 이름도 간간이 거론됐다. 하지만 STX는 두둑한 현금을 기반으로 구조조정 대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동안 M&A에 투자한 돈보다 회수한 돈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 1000억원에 인수한 STX조선해양을 2003년 10월에 상장,6501억원을 회수했고 4199억원에 사들인 STX팬오션을 싱가포르와 서울 증시에 각각 상장해 모두 1조5194억원을 거둬들였다. 또 588억원에 매입한 STX에너지에서는 수년에 걸쳐 1001억원을 배당으로 받아냈다. 최근에는 STX조선해양에서 분사한 STX중공업 지분 매각작업에 나서 수백억원의 자금을 추가회수할 것으로 전망된다.

STX 관계자는 "M&A의 가장 큰 원칙은 잘 아는 사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무적 측면에서는 무리한 부채를 일으키지 않고 투자자금을 2,3년 내에 회수할 가능성이 있느냐를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STX가 인수한 회사들은 대부분 비상장 기업들이었다. 상장이라는 확실한 출구(exit)가 있었던 셈이다.

운도 따랐다. 상장을 통해 자금을 회수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세계 증시는 호황을 누렸다. 이에 따라 STX그룹의 작년 말 현금성 자산 규모는 2조5000억원에 달했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STX 계열사들은 올해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해 1조원가량을 추가 조달,현금성자산 규모를 3조5000억원까지 불려놨다.

최근 유동성 위기에 시달렸던 다른 기업들과는 달랐던 셈이다. 실제 M&A 버블이 끼었던 2005~2007년 상장사들을 인수한 기업들은 대부분 엄청난 프리미엄을 지불했다. 처음부터 출구를 봉쇄하고 나선 셈이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기업의 성장에만 주력했던 다른 기업과 달리 STX는 항상 자금회수를 염두에 두고 M&A를 진행해 위기에도 건재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인수기업 가치 올리기

출구전략만으론 STX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STX는 M&A대상을 선정할 때 자신의 역량을 최고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M&A가 성장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 한발을 잘못 내디디면 그룹의 뿌리를 뒤흔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영능력면에서는 '인수 후 과연 기업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가'를 판단의 잣대로 삼았다. 강덕수 회장도 "M&A를 할 때는 자기가 잘 아는 산업을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STX는 턴어라운드 전문가로서도 손색없는 실력을 발휘했다. 2003년 매출 1조9771억원,순이익 430억원에 그쳤던 STX팬오션은 5년 만에 매출 8조2672억원,순이익 5778억원의 대형 선사로 성장했고 STX조선해양도 8년 만에 매출이 10배 가까이 급증했다.

선박엔진을 만들던 회사(쌍용중공업)가 사업내용을 잘 아는 고객인 조선사(대동조선)를 인수해 성장시키고 조선사를 통해 또다른 고객인 해운회사(범양상선)를 인수해 기업가치를 끌어올린 셈이다.

M&A 성공 비결에 대해 강 회장은 "인수기업의 임직원을 구조조정하는 것보다 이들을 교육하고 육성해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이 중요하다. 해외에서도 현지 기술과 문화를 존중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회사의 성장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