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에는 얼마나 많은 볼트와 너트가 들어있을까. 일반적으로 중형 승용차 한 대를 조립하는 데 2000~3000개의 크고 작은 볼트와 너트가 사용된다. 자동차 한 대에 2만개의 부품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너트와 볼트가 전체 부품의 10~15%를 차지하는 셈이다.

충청북도 진천군에 본사가 있는 선일다이파스는 26년 동안 자동차용 볼트와 너트를 생산해왔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온 이 회사는 현대,기아,GM대우 등 국내 완성차 업체 및 1차 벤더에서 사용하는 자동차용 볼트의 22%를 생산하고 있다.

선일다이파스는 개인창업회사는 아니다. 대기업을 다녔던 김영조 회장(70)이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던 회사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당시 국내에서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매니지먼트 바이아웃(경영진이 주식을 취득해 독립하는 것)'방식으로 회사를 인수한 뒤 키웠다.

전라남도 나주시가 고향인 김 회장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뒤 1963년 현 효성중공업의 전신인 한영공업에 입사했다. 이후 1967년 선경그룹에서 합성섬유사업을 시작할 때 선경그룹 대졸 공채 1기로 회사를 옮겼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과 입사동기였다.

1976년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것으로 예상, 선경기계라는 자동차용 볼트 · 너트 생산회사를 설립했다. 리더십과 성실함을 인정받은 김 회장은 44세의 나이에 이 회사의 대표이사겸 공장장에 오른다. 전환점이 된 시기는 1980년대 초. 2차 오일쇼크로 국내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선경그룹은 1983년 비주력계열사들을 팔기로 결정했다. 선경은 첫번째 케이스로 선경기계를 매각 대상으로 정하고 김 회장에게 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줬다. 김 회장은 7년 동안 사업체를 이끌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전망이 밝다고 판단,인수를 결심했다.

하지만 문제는 매입자금.이 회장은 "선경 측에서 1년 거치 7년 상환 방식으로 20억원을 빌려주기로 했으나 담보로 내놓을 재산이 없었다"며 "형제와 조카 등 일가 친척 40명의 부동산을 모두 모아봤지만 8억원밖에 안 됐다"고 회상했다. 당시 기획실에서는 절반도 안되는 담보로 어떻게 거액을 빌려주느냐며 난처해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보고 받은 최종현 회장은 "이 바보 같은 것들아.40명이 생명과 같은 전 재산을 걸었는데 담보가 문제냐"며 "이같이 가족 간에 신뢰가 있는 회사는 무조건 성공하니 김 대표에게 회사를 넘겨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선일기계라는 이름으로 독립한 회사는 이후 15년 동안 초고속 성장을 거듭한다. 무엇보다 현대 포니에 이어 기아 프라이드, 대우 르망 등 신형 차량이 잇따라 탄생했고 곧바로 수출이 시작됐다. 김 회장은 "일감이 넘치다보니 매년 20~30%씩 매출이 늘어났다"며 "이전부터 진행됐던 부품 국산화에도 가속도가 붙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자동차용 볼트 · 너트조차도 자력으로 생산하지 못했다. 금형뿐만 아니라 원자재인 특수강 선재조차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하는 형편이었다. 선일기계는 포스코 등과 협력해 선재,금형제조기술,생산기술,설비 등을 차례로 국산화하고 생산단가를 종전가격의 3분의1 수준까지 낮췄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1995년 현대자동차로부터 100PPM(불량률 100만개당 100개 이하)인증을 받을 정도로 회사는 순항했다.

그렇지만 금융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96년 기아자동차 부도가 고통의 시작이었다. 당시 회사의 1년 매출이 250억원이었는데 45억원의 어음이 휴지조각이 됐다. 곧이어 1998년 대우자동차 부도로 30억원이 또 날아갔다. 김 회장은 "그동안의 어려움은 어떻게 하면 품질 높이고 사람들을 교육시킬까라는 즐거운 고민뿐이었는데 순식간에 회사 부도위기가 코앞에 닥치니 앞이 깜깜했다"며 "어쩔 수 없이 250명이던 직원을 160명으로 줄이고 전 직원의 월급을 30% 가까이 깎아 어려운 시기를 버텼다"고 밝혔다. 하지만 돌이켜 봤을 때 금융위기는 회사의 경쟁력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고 김 회장은 평가한다. 이전까지 주문량을 대느라 챙기지 못했던 원가절감과 공정합리화,품질극대화 등의 내실화가 이 시기에 극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또 어려운 시기를 버텨내자 한국 자동차 산업의 회복과 함께 회사로 주문이 다시 밀려 들어왔다.

1999년 미국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딴 김 회장의 차남 김지훈 대표(39)도 회사에 합류해 힘을 보탰다. 김 회장은 김 대표가 유학을 떠날 때 혹시나 돌아오지 않을까봐 각서까지 받아놓고 유학을 허락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다양한 혁신활동과 기술개발에 나선다. 2000년에는 충북 진천에 공장을 준공,국제적인 생산시설을 갖추게 된다. 김 회장은 2007년 4월 대표이사직을 아들에게 넘겼다.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적인 자동차 부품회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젊은 사람이 회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결단에서였다. 김 대표가 취임한 지 1년 만인 지난해 회사는 사상 최대 매출인 903억원을 기록했다. 유럽과 중국의 자동차 부품회사에 납품하는 직수출도 전체 매출의 7%까지 늘어났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가 오늘날 세계적인 자동차 국가가 된 것은 수많은 자동차 부품회사들의 끊임 없는 품질혁신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선일다이파스를 비롯해 현대 포니에 첫 부품을 공급했던 150개 부품 회사들은 지금까지 단 한 곳도 부도나지 않고 세계적인 부품 회사로 커가고 있다"고 말했다.

진천=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