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호적(戶籍)은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다. 이를 통해 조세와 부역을 징발하고,군사 동원과 치안을 해결했다. 그러므로 백성의 귀천을 막론하고 호적 등록을 기피하거나 호적지를 이탈하는(脫籍亡人) 행위는 엄벌 대상이었다. 망명(亡命)은 '호적의 이름(命)을 지우고(亡) 도망하다'는 것이 원래 뜻이다. 죄를 짓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피신한 자를 괘씸히 여기는 권력자의 시선이 강조된 표현이다.

그러므로 망명객은 뿌리가 뽑힌 데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아무리 우대를 받아 지낸다 해도 본국에서 자객이 들이닥칠까,납치당할까 전전긍긍했다. 더욱 불안한 것은 망명지 정부가 본국에 자신을 팔아넘길 가능성이었다.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 흥정의 제물이 된다. 호화판 해외 망명을 떠난 현대의 일부 독재자들은 향수병을 호소했다지만,망명객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신변 안전이었다.

사람은 시련 중에 단련된다. 그래서 망명은 큰 인물을 만드는 그릇이 되기도 한다. 춘추시대 진(晉)의 공자 중이(重耳 · 기원전 697~628년)가 그랬다.

부왕 헌공(獻公)이 말년에 여희(驪姬)를 얻어 총애했다. 어린 소생을 후계자로 만들려는 여인의 참언(讒言) 때문에 이복 형 태자가 자살로 내몰리고,중이와 동생 이오(夷吾) 형제에게도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살기 위해 망명했다. 마흔 세 살 때였다.

외가인 적(狄)에서 지낸 지 12년.부왕이 죽고 여희의 난이 수습되자 '귀국해서 즉위하라'는 요청이 왔지만 거절했다. 살해당할 것이 염려됐다. 동생이 귀국해 혜공(惠公)으로 즉위했는데,처음부터 실정 투성이였다. 나라 안에 '역시 중이가 낫다'는 여망이 일자 형을 제거하기 위한 자객이 파견됐다. 중이는 제(齊)로 피신하면서 뒤에 남을 부인에게 일렀다.

"25년을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으면 재가하시오(待我二十五年不來,乃嫁)."

"25년이면 내 무덤의 송백나무가 많이 자라겠습니다. 그래도 기다리지요(犁二十五年,吾塚上柏大矣.雖然,妾待子)."

제 환공(桓公)의 우대를 받은 중이는 귀국 생각을 잊었다. 주위에서 귀국을 종용하자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 편하고 즐거우면 됐지(人生安樂,孰知其他).난 여기서 죽을란다. "

훗날의 그를 생각하면 <사기 진(晉)세가>의 이 대목은 일부러 그의 덕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숨은 듯하다. 결국 가신들이 그를 술먹여 취하게 한 다음 마차에 태워 귀국길에 올랐다. 술에서 깬 중이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그대의 살을 씹어먹을 테다"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19년 만의 환국이었다. 예순 두 살이 되도록 여덟 나라를 떠돌았다. 혜공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에 올랐다. 재위 9년 동안 안으로는 넉넉한 정치를 했고,밖으로는 패권 국가로서 중원(中原)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제 환공에 이어 춘추오패(春秋五覇)의 두 번째 명군(明君)으로 기록된 진 문공(晉文公)의 얘기다.

망명과 투옥만으로 10년을 채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못지않게 긴 시간을 '디제이(DJ)' '동교동' '정치 현안'이라는 익명으로만 통했다. "사람의 평가는 관 뚜껑을 덮고 난 다음의 일(丈夫蓋棺事始定)"이라고 두보는 말했지만,우리가 할 일은 그가 남긴 것들을 반성하는 것이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