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공자도 불가능하다고 한 '中道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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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와 향원(鄕愿)
홍광훈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홍광훈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지금 한창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로서 논란이 되고 있는 '중도'라는 말은 상용어 '중용'의 변형된 말이라 할 수 있다. 《논어》에서는 '중용'과 '중행(中行)'으로 쓰였고,《맹자》에서는 '중도(中道)'라 하였다. 이 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不偏不倚),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無過不及) 한가운데의 바른 길(中正之道)'이다. 《노자》 첫머리의 '상도(常道)'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불가(佛家)에서도 이를 강조한다. 이는 개인과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길'이라 하여 동 · 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덕목이 쉽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유불도(儒佛道)' 공통의 화두가 될 수 없다. 공자는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한다. "중용의 덕은 지극히 훌륭하지만 사람들은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논어》 '옹야'편) 심지어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고백한다. "남들은 모두 내가 지혜롭다고 하지만 중용을 선택하고도 한 달을 지키지 못한다. "(《중용》)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실행이 어려우므로 공자는 아예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천하와 국가를 고르게 할 수 있고,부귀영화도 사양할 수 있고,흰 칼날을 밟을 수는 있어도,중용은 불가능하다(天下國家可均也,爵祿可辭也,白刃可蹈也,中庸不可能也)."(《중용》) 또한 교사로서의 공자가 중용의 인재를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말이 《논어》'자로' 편에 보인다.
이렇게 중용 또는 중도를 실행하기가 어려운데도 그와 같이 보이려고 행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간파한 공자는 그런 부류를 일러 '향원(鄕愿)'이라 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好好先生)'으로 보이려고 이쪽 저쪽을 넘나들며 환심을 사려 한다는 뜻이다. 모두의 환심을 사는 일이야 개인적으로 좋은 일일 터이지만,문제는 줏대 없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선악과 시비(是非),정의와 원칙(原則)의 잣대가 아니라 정세의 이해 득실을 따져 행동하므로 결과적으로 사회에 도덕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공자는 이들을 '도덕을 해치는 도적(德之賊也)'으로 배척한다. (《논어》'양화'편)
《맹자》는 이 중도와 향원의 문제를 맨 끝장의 끝부분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여기서는 '향원'을 '세상에 아부하는(媚於世) 사람'으로 단정,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비난하고 매도하려 해도 특별히 뚜렷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게 행동한다. 세속과 시류에 영합하여(同乎流俗,合乎汚世) 평소 사람됨이 충실하며 신의가 있는 듯하고 행동은 청렴결백한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다들 그를 좋아하고 자신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과는 '요순의 도(堯舜之道)'로 함께 들어갈 수 없다. " 그러므로 세속과 시류에 영합하는 행위는 올바른 중도가 아니라 '사이비(似而非)'라고 단언한다. 이에 《맹자》는 '떳떳한 길로 돌아가는 것(反經)'만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라고 역설한다. 이 '떳떳한 길'이 바로 잡히면 모든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분발하게 되고 결국 사회의 사악함이 사라지게 된다(經正則庶民興, 庶民興斯無邪慝矣)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면 '보다 많은 사람'이 잘살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위정자의 책무이며,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여 나아가는 것이 현실적인 '요순의 도'요 '떳떳한 길'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 체제 및 당면 상황에서의 '요순의 도'와 '떳떳한 길'은 무엇인가.
우선 그동안 문란해질 대로 문란해진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 법치의 권위를 제대로 세워 선악과 시비를 분명히 가림으로써 모든 일이 정의와 원칙에 입각하여 상식(常識)적으로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한층 공고히 되고 시장 경제가 더욱 번성하도록 고취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근원적 처방'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세운 공약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법치 확립'과 '경제 회생'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이 둘을 가장 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억지와 생떼의 불법 시위와 파업은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이로 인한 천문학적 손실을 애꿎은 국민이 고스란히 부담하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엄청난 세비를 받는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보는 앞에서 시정 잡배보다 못한 폭력과 난동을 예사로 저지르며 위세를 부리고,국회에 '출석'하는 것이 의무인 사람들이 회기 중 엉뚱한 곳에서 국민을 선동하고 불법 시위를 주동해도 아무 제재도 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두 가지 약속이 실현될 수 있을지 심히 우려된다.
지금의 '중도실용론'은 결코 '근원적 처방'일 수 없다. 그것이 '서민 경제'를 돕는 차원의 일정한 범위에 그치면 모르되 중도와 실용의 명분으로 자칫 우리 사회의 근본 이념과 가치에 손상을 입혀 시비가 전도되고 원칙이 흔들린다면 지금의 혼란은 도리어 가중될 것이다. '향원의 정치'는 장기적 책략이 아니다.
홍광훈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