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미 "쳇바퀴 같은 투어… 법정스님 책으로 마음 다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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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LPGA투어 '한국 맏언니' 정일미 인터뷰
"미국LPGA 투어에서 우승했다면 아마 벌써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예요(웃음).조금만 지켜봐주시면 미국 무대에서도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
프로 골퍼 정일미(37)의 별명은 '스마일 퀸'이다. 최근 열린 하이원리조트컵 대회에서 아깝게 우승컵을 놓쳤을 때도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아마도 오랜 투어 생활에서 터득한 프로 근성 때문일 게다. 아시아인 최초로 미LPGA투어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는 그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10대 소녀의 모습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정일미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연습장에 가면서 골프를 배웠지만 당시는 취미 수준이었다. 고등학교 때 화가의 꿈을 접고 골퍼로 변신했지만 주니어 랭킹 100위에도 못 드는 그저 그런 선수였다. 그러던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국가대표가 되고 이화여대에 입학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갔다. 24세 때 프로로 전향한 뒤 국내 상금랭킹 1위에 오르고 통산 7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정일미는 2003년 말 돌연 '따듯한 안방'을 박차고 미LPGA 투어 도전에 나섰다. 퀄리파잉 스쿨을 거쳐 2004년부터 투어에서 뛰고 있다. 왜 그랬을까. "솔직히 자만심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최고라고 생각한 뒤 저 스스로를 좀더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졌어요. 미국에 가서 잘 하면 더 완벽해질 것 같은 욕심이 들었던 거죠.당시는 (미국에) 안 가는 게 이상할 정도였죠."
이국 땅에서의 새로운 도전은 그를 '외유내강'형 인간으로 만들었다. 하루 아침에 최고의 자리(국내 정상)에서 밑바닥(미국 투어)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모든 것을 혼자 헤쳐나가야 했기 때문.대회장소까지 차로 몇 시간씩 이동해야 하는 생활을 반복하는 데다 아직 우승이 없는 탓에 수입도 넉넉지 않다.
그렇지만 한 발짝씩 내딛는 것 외에 뾰족한 출구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올 시즌 14개 대회 중 최고 성적은 미켈롭울트라오픈에서 거둔 공동 11위이고,상금랭킹은 투어 프로 140여명의 중간인 70위(9만4982달러)를 달리고 있다. 하이원리조트컵에서 2위를 기록,상금 6800만원을 추가했다. "미국 생활 초기에는 한 줄기 빛만 보여도 힘이 날 것 같았는데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더라고요. 사서(?) 고생한 저에게 아버지께서 '미국가서 사람됐다'고 말씀하세요(웃음)."
투어 생활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 뭔지 물어봤다. 외국 선수들과의 의사 소통,잦은 장거리 이동,입맛과 다른 음식 등을 기대했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외로움'이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첫해에는 무조건 한 끼는 한국식으로 먹어야 했는데 이듬해에는 이틀에 한 끼,그 다음 해에는 나흘에 한 끼만 먹어도 됐어요. 지금은 (음식을) 별로 따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로움은 쉽게 극복이 안 돼요. (박)세리는 자기가 처음 미국 무대에 왔을 때 말할 상대가 아무도 없었다며 위로한답니다. "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안 해 본 게 없단다. 미드(미국 드라마)를 다운받고,인터넷으로 좋아하는 만화도 봤지만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법정 스님의 책을 손에 쥐고 다닌다. 올겨울 부모님이 계신 부산에 한 달가량 머물 때 법정 스님을 찾아뵐 생각도 하고 있다.
그는 여자 선수들과 부모,캐디로 이뤄진 '미LPGA 투어 부대'를 작은 산골짜기 마을에 비유했다. 만날 똑같은 사람이 같은 장소(대회장)에서 만나고,같은 음식점(한식당)을 찾으며,같은 주제(골프)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들만의 공간이라는 것."새로운 대화 주제가 없어요. 누군가 헤어스타일이 바뀌면 그게 반나절 화젯거리가 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되풀이돼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요. 일어나서 밥 먹고 연습하고 라운드 돌고 체력 훈련한 뒤 쉬고 다시 일어나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투어 생활에 쉽게 매몰될 수 있어 후배들에게 책도 가까이 하고 목표의식을 분명히 세우라고 당부합니다. "
정일미는 후배들한테 때론 엄격한 사감이다. 미LPGA 투어 선수 중 '맏언니'인데다 상임이사까지 맡고 있어 한국 선수들을 관리감독해야 할 처지다. "20대 초반 후배들이 다 예뻐 보이죠.하지만 인사 좀 잘 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으라고 자주 잔소리합니다. 좀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는 게 당당해 보이고 남들도 그만큼 대우해주는 거잖아요. "
아직 미혼인 그는 어딘가에 있을 배필이 빨리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눈이 확 돌아갈 만큼 멋진 남자 어디 없나요. 제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면 돼요. 혼자 늙어가는 건 아니겠죠(웃음)."
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
프로 골퍼 정일미(37)의 별명은 '스마일 퀸'이다. 최근 열린 하이원리조트컵 대회에서 아깝게 우승컵을 놓쳤을 때도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아마도 오랜 투어 생활에서 터득한 프로 근성 때문일 게다. 아시아인 최초로 미LPGA투어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는 그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10대 소녀의 모습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정일미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연습장에 가면서 골프를 배웠지만 당시는 취미 수준이었다. 고등학교 때 화가의 꿈을 접고 골퍼로 변신했지만 주니어 랭킹 100위에도 못 드는 그저 그런 선수였다. 그러던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국가대표가 되고 이화여대에 입학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갔다. 24세 때 프로로 전향한 뒤 국내 상금랭킹 1위에 오르고 통산 7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정일미는 2003년 말 돌연 '따듯한 안방'을 박차고 미LPGA 투어 도전에 나섰다. 퀄리파잉 스쿨을 거쳐 2004년부터 투어에서 뛰고 있다. 왜 그랬을까. "솔직히 자만심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최고라고 생각한 뒤 저 스스로를 좀더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졌어요. 미국에 가서 잘 하면 더 완벽해질 것 같은 욕심이 들었던 거죠.당시는 (미국에) 안 가는 게 이상할 정도였죠."
이국 땅에서의 새로운 도전은 그를 '외유내강'형 인간으로 만들었다. 하루 아침에 최고의 자리(국내 정상)에서 밑바닥(미국 투어)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모든 것을 혼자 헤쳐나가야 했기 때문.대회장소까지 차로 몇 시간씩 이동해야 하는 생활을 반복하는 데다 아직 우승이 없는 탓에 수입도 넉넉지 않다.
그렇지만 한 발짝씩 내딛는 것 외에 뾰족한 출구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올 시즌 14개 대회 중 최고 성적은 미켈롭울트라오픈에서 거둔 공동 11위이고,상금랭킹은 투어 프로 140여명의 중간인 70위(9만4982달러)를 달리고 있다. 하이원리조트컵에서 2위를 기록,상금 6800만원을 추가했다. "미국 생활 초기에는 한 줄기 빛만 보여도 힘이 날 것 같았는데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더라고요. 사서(?) 고생한 저에게 아버지께서 '미국가서 사람됐다'고 말씀하세요(웃음)."
투어 생활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 뭔지 물어봤다. 외국 선수들과의 의사 소통,잦은 장거리 이동,입맛과 다른 음식 등을 기대했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외로움'이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첫해에는 무조건 한 끼는 한국식으로 먹어야 했는데 이듬해에는 이틀에 한 끼,그 다음 해에는 나흘에 한 끼만 먹어도 됐어요. 지금은 (음식을) 별로 따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로움은 쉽게 극복이 안 돼요. (박)세리는 자기가 처음 미국 무대에 왔을 때 말할 상대가 아무도 없었다며 위로한답니다. "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안 해 본 게 없단다. 미드(미국 드라마)를 다운받고,인터넷으로 좋아하는 만화도 봤지만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법정 스님의 책을 손에 쥐고 다닌다. 올겨울 부모님이 계신 부산에 한 달가량 머물 때 법정 스님을 찾아뵐 생각도 하고 있다.
그는 여자 선수들과 부모,캐디로 이뤄진 '미LPGA 투어 부대'를 작은 산골짜기 마을에 비유했다. 만날 똑같은 사람이 같은 장소(대회장)에서 만나고,같은 음식점(한식당)을 찾으며,같은 주제(골프)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들만의 공간이라는 것."새로운 대화 주제가 없어요. 누군가 헤어스타일이 바뀌면 그게 반나절 화젯거리가 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되풀이돼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요. 일어나서 밥 먹고 연습하고 라운드 돌고 체력 훈련한 뒤 쉬고 다시 일어나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투어 생활에 쉽게 매몰될 수 있어 후배들에게 책도 가까이 하고 목표의식을 분명히 세우라고 당부합니다. "
정일미는 후배들한테 때론 엄격한 사감이다. 미LPGA 투어 선수 중 '맏언니'인데다 상임이사까지 맡고 있어 한국 선수들을 관리감독해야 할 처지다. "20대 초반 후배들이 다 예뻐 보이죠.하지만 인사 좀 잘 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으라고 자주 잔소리합니다. 좀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는 게 당당해 보이고 남들도 그만큼 대우해주는 거잖아요. "
아직 미혼인 그는 어딘가에 있을 배필이 빨리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눈이 확 돌아갈 만큼 멋진 남자 어디 없나요. 제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면 돼요. 혼자 늙어가는 건 아니겠죠(웃음)."
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