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입사 3년만에 후배가 들어왔다…헉! 고등학교 2년 선배다
사람을 잘 만나는 건 큰 복이다. 월급쟁이에겐 더욱 그렇다. 상사나 부하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직장생활은 확 달라진다. 출중한 능력과 후덕함을 갖춘 상사 및 책임감 있고 충성심 강한 부하와 함께 일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대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그 반대가 더 많다. 새까만 대학 후배가 상사로 오거나,어렵기만한 고교 선배가 부하로 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뿐만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담당 임원으로 승진한 후배 직원,외부에서 스카우트돼 상사로 날아온 군대 후임병,경력사원으로 들어온 옛 애인 등.곳곳이 지뢰밭이다. 아무리 직급 및 나이 파괴,실력주의 사회가 되고 있다지만,김 과장 · 이 대리처럼 평범한 직장인에게 '관계의 역전'은 풀기 힘든 숙제일 수밖에 없다.

◆헉! 갑자기 후배가 상사로…

국내 대기업에 다니는 박모 부장(49)은 얼마 전 같은 회사 이 상무(47)와 '신사협정'을 맺었다. 다름아닌 존칭 문제였다. 일과 중에는 박 부장이 이 상무를 깍듯이 예우하되,사석에선 반대로 하기로 했다. 이유는 이랬다. 이 상무는 박 부장의 입사 2년 후배다. 한때는 사수와 조수로 근무하기도 했다. 가끔은 박 부장이 이 상무의 군기를 잡기도 했다.

그러던 작년 말 이 상무가 덜컥 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자 둘 관계가 어색해졌다. 박 부장은 말투를 갑자기 바꾸기도 쉽지 않아 가능하면 사내에서 부딪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박 부장에게 이 상무가 어느 날 신사협정을 제의해 왔다. "회사 그만둘 게 아니라면 회사 안과 회사 밖 위계질서를 달리하자"고.목구멍이 포도청인 박 부장으로선 이 상무의 신사협정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중견그룹 경영전략실에서 근무하는 김모 차장(39).현장 영업직부터 시작해 마케팅실 총무부 등 회사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사내 에이스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런 김 차장에게 최근 말 못할 고민이 생겼다. 국내 굴지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스카우트돼 온 한모 팀장(38) 때문이다. 한 팀장은 큰물에서 놀아본 사람다웠다. 똑 부러지는 일 처리와 분명한 상하관계 등.팀장으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문제는 한 팀장이 김 차장의 고교 한 해 후배라는 점.고교시절부터 동아리 활동을 같이하면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 후배를 팀장으로 모시자니 김 차장으로선 죽을 맛일 수밖에.물론 한 팀장은 깍듯하다. 사석에서는 언제나처럼 "형"이라고 부른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종전처럼 대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김 차장은 "알았다"고 답변하지만,속으론 사표를 썼다 지웠다 하기를 반복한다.

◆아! 고문관 부하가 하필 학교 선배라니

국내 모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모 지점장(47).그는 최근 지방 지점장에서 서울 지점장으로 발령받은 뒤 3년 묵은 체증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후련함을 맛봤다. 단순히 서울지점장으로 입성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음의 짐이었던 고교 선배와 드디어 갈라서게 됐기 때문이다.

고교 선배는 몇 년 전 지점장 승진에서 물을 먹었다. 그리곤 김 지점장 점포의 차장으로 발령받았다. 처신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더욱 힘들었던 건 그 선배의 업무 능력.함께 일을 해보니 승진에서 물먹은 이유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앓이 하기를 2년.찜찜하기만 했던 관계에서 벗어난 것이 다른 무엇보다 기뻤다.

대기업 근무경력 6년차인 박모 대리(32).그의 꿈은 최고의 영업맨이다. 이를 위해 정교한 일처리,마당발 같은 네트워크를 갖추기 위해 줄곧 노력해 왔다. 연애와 정치 경제를 넘나드는 '구라풀기'와 두주불사형 술 실력도 갖췄다. 이런 박 대리에게 최근 걸림돌이 생겼다. 얼마 전 전입해 온 사원 하나가 '고문관' 그 자체인 것.더욱이 그 사원은 박 대리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 대학교 같은 과 선배였다. 고시공부를 하다가 늘그막에 월급쟁이로 들어왔다. 대학 선배인 건 문제도 아니었다. 넉살 좋은 박 대리로선 충분히 견딜만 했다. 문제는 업무처리 능력.영업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팀워크를 중시하는 박 대리로선 대학 선배와 일하는 것 자체가 끔찍,그 자체다.


◆악연의 반전…어찌하오리까

대기업 영업팀에 근무하는 김길용 과장(36).그는 최근 신규 거래처를 방문했다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했다. 거래처 담당부서의 책임자가 바로 자신의 군대 직속 후임병이었기 때문.더욱이 그는 부친 회사를 물려받을 후계자였다. 군시절 김 과장은 '미친개'라고 불릴 정도로 악질 고참으로 유명했다. 거래처의 후계자는 자신에게 당할 만큼 당했던 이른바 '고문관 쫄따구'였다. 애정 담은(?) 스킨십은 물론 부대 전통으로 내려오던 정기적인 새벽 화장실 집합까지….'거래를 끊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행히 후임병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김병장님,반갑습니다'라며 살갑게 대했다. 그래도 김 과장은 소주 한잔 마시며 무릎 꿇고 사과할 마음을 굳히고 있다.

이 정도는 약과다. 모 제약회사의 민모 부장(39 · 여)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여고 3년 후배인 차모 이사를 두고볼 수 없어 다음 달 회사를 그만둘 작정이다. 차 이사는 3개월 전 외국계 회사에서 이사로 스카우트돼 왔다. 마침 회사에 고교 동문 모임이 있어 차 이사도 민 부장이 고교 선배인 것을 금방 알았다. 그런데도 차 이사는 민 부장을 '아랫사람'으로만 대했다. 하다못해 넌지시 항의했더니,"선배! 공(公)과 사(私)는 구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며 눈을 똑바로 뜨고 정색을 하는 게 아닌가. 민 부장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사직이다. "사람이 싫어 이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게 민 부장의 하소연이다.

◆연인이여,왜 이렇게 만납니까

중견 화장품 회사 홍보실에서 일하는 한모 대리(28 · 여)는 같은 팀 사원인 정모씨(29)를 속으로 좋아하고 있다. 정씨는 사내 모델 물망에 오를 정도로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에 190㎝의 큰 키,착한 성품,유머감각까지 갖췄다. 내심 흑심을 품은 한 대리는 어쩌다 둘만 있게 되면 "오빠"라고 부르며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대리의 이상한 호칭을 환갑이 다된 본부장이 들었다. 본부장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공사 구분을 하지 못한다"며 한 대리를 호통쳤다. 그래서 지금은 꼼짝없이 정씨에게 반말을 쓰지만,그때마다 가슴이 쓰려 온다.

만나선 안 될 사람을 동료로 맞닥뜨리는 경우도 있다. 중소 문구회사 7년차인 차모 과장은 최근 경력으로 입사한 한 여사원을 먼 발치에서 보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5년 전,인터넷 영어회화 동아리에서 만나 1년간 '죽자사자' 만나다 같은 동아리 여자 후배와 사귀는 바람에 그녀와 헤어졌던 아픈 기억 탓이다. 그는 "사실상 내가 찬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엘리베이터나 식당에서 만날 때마다 죽을 맛"이라며 "오히려 태연한 척 하고 있는 그녀를 볼 때가 숨이 더 막힌다"고 말했다.

이관우/이정호/정인설/이상은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