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 600만명 시대] (下) '파산자 천국' 미국도 요건 강화…신청자 1년 만에 5분의 1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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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모럴 해저드 막아라
채무자들 사이에 개인워크아웃보다 파산이 훨씬 손쉽고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는 사실은 통계적으로 증명된다.
2006년 이후 지난 7월 말까지 워크아웃을 신청한 사람은 28만7544명인 반면 법원에 파산 또는 회생을 신청한 사람은 65만3374명으로 배가 넘는다. 채무재조정을 통해서라도 성실히 빚을 갚기보다는 법원을 통해 '한방에' 빚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인이 훨씬 크다는 얘기다.
한국 사회보다 훨씬 빨리 이 같은 문제점에 봉착했던 선진국의 경우 어떤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을까. 소비의 천국이자 파산의 천국으로 불리는 미국의 경우 2000년 83만9000명이었던 개인파산 신청자가 2005년에는 163만1000명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과다 채무자를 신속히 구제해서 정상적인 소비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야 소비에 기반을 둔 경제가 지속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으로 채무자에게 관대한 파산제도를 운영해 온 탓이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6년 개인파산 신청자는 34만9000명으로 1년 만에 80% 가까이 급감했다. 그 사이 미국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파산 절차 강화하자 신청 건수 5분의1로
그동안 미국에서는 파산법이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특히 1994년 차압금지 재산의 범위를 2배로 늘리는 등 채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파산법을 개정한 이후 이 같은 비판이 높아졌다. 개인파산 신청자가 급증하면서 과다채무자의 경제적 회생을 돕는다는 파산법의 본래 취지와 달리 채권자의 권리 침해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개인파산 중 상당수가 생활고보다는 무분별한 소비로 인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경기침체기보다 경기확장기에 파산 신청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기확장기에 파산 신청이 늘어났다는 것은 생활고보다 과다 소비로 인한 파산이 많았음을 시사한다"며 "은행 대출과 신용카드 사용이 증가한 것 등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미국은 2005년 연방도산법을 개정,개인파산의 신청 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했다. 거주하고 있는 주에서 평균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채무자는 파산을 신청할 수 없게 했고 파산 결정과 함께 내려지는 면책 범위도 전보다 축소했다.
개인파산 신청자는 사전에 비영리 신용상담기구의 상담을 받도록 의무화했고 면책을 받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의 신용 및 재무관리 교육을 이수하도록 했다. 그 결과 법 개정 이듬해인 2006년 미국의 파산 신청 건수는 전년도의 20% 수준으로 감소했다.
◆파산 신청 전 채권 · 채무자 간 합의 필수
개인파산 절차와 요건을 강화해 채무자의 건전한 신용 회복을 유도하고 있는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개인파산 및 면책제도의 남용을 억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다.
독일은 채무자가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기 전에 반드시 당사자 간 채무 조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는 재판 외 합의와 재판상 합의로 나뉘는데 재판 외 합의 과정에서는 민간 채무상담기관이나 변호사 등 전문가들이 중재자로 나서 채무자와 채권자가 협상을 하도록 한다. 파산 신청 전에 당사자 간 협상을 통해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한 것이다.
재판상 합의는 법원의 감독하에 진행된다. 채무자가 채무 정리 계획을 세워 법원에 제출하면 법원은 이를 채권자에게 보내 동의를 구한다. 이 같은 제도는 채무자 스스로의 노력과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 회생 기회를 만들어 줌으로써 파산자 수를 줄이고 채권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개인 채무자는 재판 외 합의 절차와 법원의 조정 절차를 거치고 나야 파산신청을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정상적인 채무 상환이 불가능한 채무자 중 75%가량이 재판 외 합의절차를 통해 채무를 조정받는다. 사전 조정 절차가 무분별한 파산 신청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민간 기구나 행정기관을 통한 중재 절차를 의무화하고 있다.
신복위 관계자는 "유럽 국가들은 파산 및 면책에 이르는 과정과 절차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며 "반복된 합의과정을 거치도록 함으로써 채권자와 채무자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선 파산해도 6년간 빚 갚아야
파산 신청에 이르기까지 채무자가 빚을 갚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지를 엄격하게 따지는 것도 선진국 채무자 구제제도의 특징이다.
독일은 파산을 신청한 채무자에게까지도 상환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채무자는 파산 절차가 시작된 이후 '성실행위기간'이라고 불리는 6년 동안 면제 범위에 속하지 않는 소득을 전액 채무 상환에 써야 한다. 또 고용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돈을 벌어서 빚을 갚으라는 얘기다.
6년간의 성실행위기간에 최선을 다해 빚을 갚고 난 후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어야 채무자는 비로소 남은 채무에 대해 최종 면책을 받을 수 있다.
영국에서는 파산 결정이 이루어져도 채무자가 부양가족의 생계비를 초과하는 소득이 있을 경우 2~3년간 채무 상환에 써야 한다. 학자금 대출을 비롯한 일부 채무는 면책 대상에서 제외된다.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도 파산을 결정하기 전에 채무자가 빚을 갚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관련 서류를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대표는 "소비자 파산은 기업의 법정관리와 같은 것으로 필요한 제도임에는 분명하다"며 "다만 엄격한 사후관리와 함께 이를 악용하거나 관여한 사람에 대한 강력한 형사처벌을 통해 제도적 허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2006년 이후 지난 7월 말까지 워크아웃을 신청한 사람은 28만7544명인 반면 법원에 파산 또는 회생을 신청한 사람은 65만3374명으로 배가 넘는다. 채무재조정을 통해서라도 성실히 빚을 갚기보다는 법원을 통해 '한방에' 빚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인이 훨씬 크다는 얘기다.
한국 사회보다 훨씬 빨리 이 같은 문제점에 봉착했던 선진국의 경우 어떤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을까. 소비의 천국이자 파산의 천국으로 불리는 미국의 경우 2000년 83만9000명이었던 개인파산 신청자가 2005년에는 163만1000명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과다 채무자를 신속히 구제해서 정상적인 소비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야 소비에 기반을 둔 경제가 지속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으로 채무자에게 관대한 파산제도를 운영해 온 탓이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6년 개인파산 신청자는 34만9000명으로 1년 만에 80% 가까이 급감했다. 그 사이 미국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파산 절차 강화하자 신청 건수 5분의1로
그동안 미국에서는 파산법이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특히 1994년 차압금지 재산의 범위를 2배로 늘리는 등 채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파산법을 개정한 이후 이 같은 비판이 높아졌다. 개인파산 신청자가 급증하면서 과다채무자의 경제적 회생을 돕는다는 파산법의 본래 취지와 달리 채권자의 권리 침해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개인파산 중 상당수가 생활고보다는 무분별한 소비로 인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경기침체기보다 경기확장기에 파산 신청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기확장기에 파산 신청이 늘어났다는 것은 생활고보다 과다 소비로 인한 파산이 많았음을 시사한다"며 "은행 대출과 신용카드 사용이 증가한 것 등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미국은 2005년 연방도산법을 개정,개인파산의 신청 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했다. 거주하고 있는 주에서 평균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채무자는 파산을 신청할 수 없게 했고 파산 결정과 함께 내려지는 면책 범위도 전보다 축소했다.
개인파산 신청자는 사전에 비영리 신용상담기구의 상담을 받도록 의무화했고 면책을 받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의 신용 및 재무관리 교육을 이수하도록 했다. 그 결과 법 개정 이듬해인 2006년 미국의 파산 신청 건수는 전년도의 20% 수준으로 감소했다.
◆파산 신청 전 채권 · 채무자 간 합의 필수
개인파산 절차와 요건을 강화해 채무자의 건전한 신용 회복을 유도하고 있는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개인파산 및 면책제도의 남용을 억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다.
독일은 채무자가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기 전에 반드시 당사자 간 채무 조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는 재판 외 합의와 재판상 합의로 나뉘는데 재판 외 합의 과정에서는 민간 채무상담기관이나 변호사 등 전문가들이 중재자로 나서 채무자와 채권자가 협상을 하도록 한다. 파산 신청 전에 당사자 간 협상을 통해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한 것이다.
재판상 합의는 법원의 감독하에 진행된다. 채무자가 채무 정리 계획을 세워 법원에 제출하면 법원은 이를 채권자에게 보내 동의를 구한다. 이 같은 제도는 채무자 스스로의 노력과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 회생 기회를 만들어 줌으로써 파산자 수를 줄이고 채권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개인 채무자는 재판 외 합의 절차와 법원의 조정 절차를 거치고 나야 파산신청을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정상적인 채무 상환이 불가능한 채무자 중 75%가량이 재판 외 합의절차를 통해 채무를 조정받는다. 사전 조정 절차가 무분별한 파산 신청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민간 기구나 행정기관을 통한 중재 절차를 의무화하고 있다.
신복위 관계자는 "유럽 국가들은 파산 및 면책에 이르는 과정과 절차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며 "반복된 합의과정을 거치도록 함으로써 채권자와 채무자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선 파산해도 6년간 빚 갚아야
파산 신청에 이르기까지 채무자가 빚을 갚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지를 엄격하게 따지는 것도 선진국 채무자 구제제도의 특징이다.
독일은 파산을 신청한 채무자에게까지도 상환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채무자는 파산 절차가 시작된 이후 '성실행위기간'이라고 불리는 6년 동안 면제 범위에 속하지 않는 소득을 전액 채무 상환에 써야 한다. 또 고용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돈을 벌어서 빚을 갚으라는 얘기다.
6년간의 성실행위기간에 최선을 다해 빚을 갚고 난 후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어야 채무자는 비로소 남은 채무에 대해 최종 면책을 받을 수 있다.
영국에서는 파산 결정이 이루어져도 채무자가 부양가족의 생계비를 초과하는 소득이 있을 경우 2~3년간 채무 상환에 써야 한다. 학자금 대출을 비롯한 일부 채무는 면책 대상에서 제외된다.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도 파산을 결정하기 전에 채무자가 빚을 갚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관련 서류를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대표는 "소비자 파산은 기업의 법정관리와 같은 것으로 필요한 제도임에는 분명하다"며 "다만 엄격한 사후관리와 함께 이를 악용하거나 관여한 사람에 대한 강력한 형사처벌을 통해 제도적 허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