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인 1995년 8월 초,그때 기자는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캐너배럴 우주센터에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통신위성 무궁화1호가 맥도널 더글러스(MD)사의 델타Ⅱ로켓에 실려 우주로 올라가는 역사적인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닥쳐온 허리케인으로 인해 발사일정은 이틀인가 연기됐지만,폭풍우가 지나간 8월5일 현지의 아침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깨끗했다.

마침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고,무궁화위성을 태운 델타Ⅱ로켓은 엄청난 화염과 거대한 폭발음을 내면서 지면을 박차고 올랐다. 길고 흰 꼬리를 만들면서 수직으로 솟구친 로켓이 시야에 머문 시간은 꽤나 길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의심할 바 없는 성공적 발사에 모두 벅찬 가슴으로 환호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우연히 마주친 MD사 관계자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직감은,잠시 후 위성이 예정됐던 고도 3만6000㎞의 정지궤도 진입에 실패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으로 확인됐다. 주 엔진에 달린 보조로켓 9개 가운데 하나가 떨어지지 않고 끌려 올라가는 바람에 추진력이 모자랐던 탓이었다.

나중에 보조로켓 분리를 위한 점화퓨즈 이상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는데,로켓이 발사대에 세워져 있을 때 허리케인이 뿌린 빗물이 스며들어 고장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는 원인이 어처구니 없었다. 그나마 무궁화위성에는 자체 추진체가 달려 있어 다시 궤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이 때의 많은 연료소모로 원래 10년이었던 위성수명이 4년3개월로 줄어들었다.

다음 해인 1996년 1월 같은 곳에서 무궁화2호가 발사됐다. 행여 부정 탈까 싶어,로켓 앞에서 돼지머리를 대신한 통돼지 바비큐를 놓고 고사(告祀) 지내는 희한한 장면까지 연출했다. 그 정성에 하늘도 감복했는지 무궁화2호는 아무 탈없이 올라갔다.

우리 우주도전의 역사는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지난 8월25일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 또한 예정궤도 진입에 실패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위성 덮개가 분리되지 않은 예상 밖의 사고 조차도 무궁화1호 때와 닮은 꼴이라는 점에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에 집착해 1단 로켓을 제공한 러시아와의 기술협력,우주개발 정책과 추진시스템이 졸속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우리 연구기반이 미비한 데다 기술진의 역량도 부족한데 과욕을 부렸다고 책망한다. 정부의 조급증으로 수천억원의 돈을 쓰고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자존심만 무너뜨렸다는 비난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얘기야말로 하기 좋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 1단 로켓은 달리 대안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우리가 이뤄낸 기술적 성취는 작은 게 아니다. 14년 전의 무궁화1호는 이름만 우리 것이었을 뿐,위성체는 록히드 마틴이 만들었고 발사체는 MD 것이었다. 그래도 이번 나로호는 우리 땅에 세워진 발사대에서 쏘았고 우리 손으로 개발한 위성체와 2단 로켓을 실었다.

과학기술은 도전과 실패의 산물이다. 그래서 실패를 성공으로 가는 한 과정으로,두려워할 게 아니라 더 많이 배우고 발전하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돈을 쏟아부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 과학이고 그 과학을 응용해 돈을 만드는 것이 기술이고 보면,타산으로 따질 수 없는 과학이 결국 돈되는 기술로 되돌아 오게 마련이다. 특히 대표적 거대과학(Big Science)이자 모든 기초과학과 응용기술의 정수(精髓)인 우주개발은 돈 · 시간과의 싸움이다. 지금은 큰 쓸모가 없을 것 같아도 그것에 도전하고 자립을 이뤄내지 않고는 기술강국으로 올라설 수 없다. 굳이 나로호 실패의 원인을 찾고 반성한다면 과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정책부재,교육의 외면,투자 소홀이 그 본질일 것이다.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