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쇼핑카트.돈 100원만 넣으면 쇼핑 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국민 장바구니'라 할 만하다. 물건을 사기 위해 유통매장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 쇼핑도구이지만 정작 어느 회사 제품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주인공은 쇼핑카트,철제가구 및 전시대 전문제조기업인 삼보.2대 엄상욱 대표(43)는 "국내에서 사용되는 쇼핑카트의 거의 전부가 우리 회사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삼보는 1968년 설립돼 국내 최초로 쇼핑카트를 만들었다. 연간 매출은 약 130억원.현재 미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를 비롯해 세계 17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창업자 전창옥 회장(71)은 1964년 덕성여대 약대를 다니다가 결혼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그가 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8년.생활비를 벌 목적으로 틈틈이 과외교습을 해오던 차에 좀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전 회장은 친정에서 4만원을 빌려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 철제 진열대나 액세서리 등을 만들어 파는 가게인 삼보상사를 차렸다. 전 회장의 손재주 덕분에 물건이 예쁘고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잘 됐다. 그러던 중 전 회장은 1972년 철제 전시대를 납품하는 공장을 인수하면서 철사가공업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거래처 대표가 하도 노름을 좋아해 물건이 제 때 납품되지 않자 차라리 내가 하겠다는 생각으로 덤벼들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 말 국내 최초의 대형 유통체인인 새마을 슈퍼가 곳곳에 생겨나면서 회사의 카트 사업도 시작됐다. 새마을슈퍼 등 체인유통점 측이 당시 미군 부대 내 슈퍼마켓에서 쇼핑카트가 사용되는 것을 보고 국내에도 도입하고 싶다며 5대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전 회장은 "생소한 물건을 어떻게 만들까 고심하다가 미군이 사용하던 중고 카트를 가져와 미국인보다 체격이 작은 한국 사람에게 맞게 고쳐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국내 최초의 '한국형 카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진열대 수요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80년대 들어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었던 슈퍼마켓이 서서히 대형화되면서 카트 매출도 늘기 시작했다.

1986년 삼풍백화점에 면적 3300㎡로 국내 최대 규모의 슈퍼마켓인 하이퍼마켓이 생겨나면서 삼풍백화점 측은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카트를 만드는 회사였던 삼보에 카트 공급을 요청했다. 전 회장은 "당시에는 생산시설이 변변치 않아 모든 작업을 손으로 했다"며 "납기를 맞추려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틀에 대고 철사를 구부리는 것은 다반사였고 제품 도장을 위해 시너작업을 하다가 담배 불이 옮겨붙어 얼굴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 매출은 이전의 10배 가까운 30억원으로 증가했다.

90년대 중반 국내에 까르푸를 비롯한 다국적 대형 마트가 속속 들어서면서 그들이 자국에서 사용하던 카트를 값은 싸고 품질이 우수한 삼보 제품으로 대체하면서 회사의 매출은 약 60억원까지 뛰었다. 전 회장은 "외국계 회사들이 '아시아 제품은 믿을 수 없다'고 하기에 처음에는 카트를 공짜로 주면서 영업에 나섰다"고 술회했다.

이처럼 '잘 나가던' 회사도 1997년 말 외환위기의 '태풍'에서 비켜날 수는 없었다. 연간 매출의 절반에 가까운 약 30억원어치의 어음이 돌아오면서 존폐의 기로에 몰렸다. 하지만 전 회장은 회사 자금을 총동원한 것은 물론 개인 예금까지 털어가며 1년 이내 돈을 갚았다. 이뿐만 아니었다. 오히려 '공격 경영''에 나섰다. 생산을 늘릴 목적으로 약 4억원을 들여 산업용 로봇 4대를 공장에 도입, 공정의 절반 이상을 자동화했다.

전 회장은 당시의 결단에 대해 "잃은 만큼 벌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설명했다. 로봇 도입 후 생산성이 2배 이상 높아졌고 회사의 제품을 체험해본 다국적 유통업체의 입소문을 타고 회사는 2007년 이후 본격적인 해외 수출길까지 열게 됐다.

엄상욱 대표는 2남1녀의 장남으로 대학(서울산업대 기계공학과 85학번)재학 시절부터 회사에서 친구들과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기서 번 돈으로 등록금과 용돈을 충당했다. 그는 1990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회사에 평사원으로 들어왔다. 엄 대표는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 도저히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며 "어린 시절부터 당연히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온 데다 졸업을 앞두고는 어머니를 돕고 싶다는 마음에 입사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입사 후 공장에서 철사 구부리는 일부터 시작해 용접,영업,구매,회계 등 회사업무를 두루 거치며 전창옥 회장의 든든한 사업파트너가 됐다.

처음에는 사장 아들이라는 '출신성분'으로 우대받기는커녕 텃세를 받기 일쑤였다. 용접공이 자신은 마스크를 쓰고 엄 대표는 맨 얼굴로 용접보조에 나서게 하면서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불을 붙이는 바람에 눈에 화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페인트공을 돕는 중에 페인트공이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말도 안하고 도료를 뿌려대 페인트를 들이마시기도 했다. 엄 대표는 "눈이 아파서 밤새 운 적도 있고 침을 뱉으면 파란색 침,검은색 침이 나올 정도였다"며 "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길을 가는데 아이와 지나가던 엄마가 '공부 안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고 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엄 대표는 부사장으로 승진한 7년 전부터 전창옥 회장을 대신해 경영을 전담하다시피했고 지난해 1월 대표에 취임했다. 엄상욱 대표는 "아직도 어머니를 넘어서려면 멀었다고 생각한다"며 "세계 시장에서 1등을 하는 제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밝혔다.

김포(경기)=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