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아픈 허리를 고쳐드리겠다는 약속을 시로 표현한 일이 있었는데,나의 고민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고민은 항상 내 곁에 붙어 다니다 10여년 전 접한 '로렌조 오일'이란 영화를 통해서야 정리될 수 있었다.
'로렌조 오일'은 제대로 된 치료약조차 없던 불치병에 걸린 아이의 투병기를 그리고 있다. 로렌조라는 다섯 살 난 아들이 부신백질이영양증(ALD)이란 희귀병에 걸리고,의사들마저 치료를 포기하자 부모가 나서 치료약을 찾아낸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아이를 향한 부모의 헌신적인 노력은 마침내 효과적인 새로운 처방을 발견해냈다. 아쉽게도 그 처방은 질환의 진행을 늦출 뿐 식물인간이 되기 전 상태로 돌아오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2년밖에 살지 못 할 것이라는 처음 진단과 달리 '로렌조 오일'에 힘입어 30세가 되던 지난해까지 부모의 곁을 지켰다. 로렌조 오일은 지금까지도 세계의 의사들이 처방하고 있으며 초기에 투약받은 아이들은 정상인과 다름 없이 생활하고 있다.
영화 중 절망에 빠진 아내를 위로하는 로렌조 아버지의 이야기는 내게 의사의 길과 시인의 길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열쇠와도 같았다. "여보,우리가 하는 이 모든 노력이 이미 고통을 받아 버린 우리 아이가 아니라 다른 많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봤소?" 짧은 대사지만 부모의 애절한 마음으로 찾아낸 새 치료법이 자신의 아들과 같은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다른 많은 아이들에게 구원의 치료이자 한 없는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 영화를 계기로 최소 침습 치료 등 척추 전문의로서 꾸준히 연구해 온 새 치료법들이 의학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랑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토록 열망하는 시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에도 눈을 뜨게 됐다. 상대를 겸손하게 이해하고,그 이해를 통해 깊이 고민하며 때로는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술과 시는 닮아 있었고 로렌조 오일을 통해 새로운 생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물론 이후에도 두 길에 대한 시간 배분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난 파란색이 없으면 빨간색을 쓰지'라는 피카소의 말처럼 진료실에 있을 때와 시를 쓸 때 서로에 대한 구분과 간섭 없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파랑과 빨강이 결국 회화라는 틀 속의 한 방법인 것처럼 의술과 시 역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보면 한 가지 길이었던 것이다.
이상호 <우리들병원그룹이사장 shlee@woorid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