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경영체제 개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아직 조심스럽긴 하지만 현행 계열사 간 독립경영 체제를 허물고 과거 전략기획실 체제처럼 그룹 중심에 강력한 컨트롤 타워를 구축할 것이라는 관측이 삼성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전망은 실질적 의사결정권이 없는 현 사장단협의회의 한계,삼성특검과 관련한 일련의 재판 일정이 마무리된 점,점차 빨라지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행보,무엇보다도 그룹 내부에 퍼지고 있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 등을 근거로 삼고 있다.


◆내년 사업계획 수립 앞당긴 이유는

삼성그룹이 경영체제 개편을 준비하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우선 내년 사업계획 작성 시기가 계열사별로 보름에서 한 달 정도 앞당겨졌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계열사들은 이미 지난달부터 사업계획 초안 작성에 들어간 상태다. 연말로 갈수록 그룹 경영 구도에 큰 폭의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사업계획을 조기에 확정함으로써 경영체제 불안 요인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 등 주요 계열사 경영을 맡고 있는 사장들 역시 그룹 조직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지금처럼 느슨한 사장단협의회 체제로는 급변하고 있는 경영환경에 일사불란하게 대응하기 어렵고,담대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중 · 장기 전략을 수립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룹 조직 복원의 관건은 오너십

하지만 그룹체제 개편은 △이건희 전 회장의 경영 복귀 △이재용 전무의 경영 일선 전면 등장 △전략기획실 복원 등의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최종적으로 어떤 모양새를 띨지 예단하기 어렵다. 특히 이 전 회장과 이 전무의 거취 문제는 정부 동향이나 여론의 향배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여 섣불리 결정하기 힘든 사안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룹 조직을 재건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전 회장이나 이 전무를 정점으로 하지 않는 그룹 조직은 현 사장단협의회처럼 강력한 조정 능력이나 실행 능력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오너 경영체제 재건에 따른 리스크 요인들을 거론하며 당분간 현 체제를 유지할 것이라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삼성의 보수적인 의사결정 관행을 떠올려보면 무조건 배척할 수만은 없는 관측이다.

◆"선견과 결단이 없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전략기획실 해체 이후 삼성 특유의 응집력이 약해지고 이 전 회장으로 대표되는 선견과 결단의 경영이 실종된 데 따른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자 계열의 한 사장은 "최근 글로벌 기업들의 사생결단식 제로섬 게임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일선 사장들은 월간이나 분기 단위의 의사결정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며 "2년,3년 후를 내다보는 경영전략이나 로드맵 구축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토로했다.

지금보다 경영 환경이나 실적이 악화될 경우 그룹 조직 복원을 위한 '명분'은 쌓을 수 있겠지만 한발짝만 삐끗하면 경쟁 대열에서 추락하고 마는 현실에서 무작정 시일을 끌 수 없다는 지적이다.

각 사장들이 실적 위주의 경영을 펼치는 가운데 그룹 경영진단(감사) 기능 실종으로 계열사들의 단기 실적을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중 · 장기 전략 과제를 도출하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사장들이 단기실적 달성에 지나치게 매달릴 경우 기업 본연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도 있다"며 "전자 SDI 중공업 에버랜드 등이 경영진단을 통해 많은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었던 것처럼 경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흐트러지는 대오

이 같은 지적은 최근 미묘한 갈등을 빚고 있는 삼성전자와 삼성LED의 관계를 통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발광다이오드(LED) 시장을 본격 공략하기 위해 연초에 설립된 삼성LED는 거래처인 LG디스플레이에 LED를 공급하고 있다. 그런데 LG디스플레이가 LED 패널을 미국 TV 메이커인 비지오에 공급하면서 삼성LED는 결과적으로 삼성전자의 경쟁사를 돕고 있는 꼴이 됐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삼성LED에 드러내놓고 항의할 수가 없다. "당신들이 우리 회사 실적을 책임질 거냐"는 대답을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윤부근 삼성전자 TV 담당 사장과 김재욱 삼성LED 사장은 그룹 입사동기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