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한나라당은 녹색산업을 뒷받침할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중점 처리할 43개 법안 중 하나로 골랐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7월1일 국내 최초의 양산형 하이브리드 승용차인 '아반테 하이브리드'를 내놨다. 녹색성장의 길을 가기 위해 민 · 관이 보조를 착착 맞춰 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웃 일본에 비하면 무려 12년이나 늦은 출발이다. 온실 가스 배출량을 의무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의 '교토의정서'가 채택된 1997년 일본 정부는 '저탄소 사회'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제시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도요타자동차가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승용차인 프리우스를 생산해 낸 것도 그때였다.

◆비즈니스 기회 선점한 일본

늦었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미국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기후변화협약의 질서 속에 들어오기로 공언한 만큼 본격적인 그린 산업 대전(大戰)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탄소배출권 시장이 열릴 것이고 신재생에너지 기술 경쟁에 불이 붙게 될 것이다.

정부의 '저탄소 녹색성장 전략'은 아직 구호에 그치고 있다. 매일 TV에서 공익광고로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구호가 등장하지만 사실 민간기업과 개인은 아직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지금은 직접적인 감축의무 대상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탄소배출량을 줄이고도 증빙 자료를 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업이 대다수다.

일본은 민 · 관이 합심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포스트' 교토 의정서 시대를 선점하겠다는 목표로 온실가스 배출 규제와 관련된 모든 것에서 국부를 창출할 기회를 찾아 나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07년 5월 기후변화 대응을 신성장동력으로 삼기 위해 세부전략을 수립하는 내용의 '에너지혁신기술계획'을 내놨다. 특히 전기자동차와 태양전지 분야에서는 확실한 우위에 서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기업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미쓰비시상사는 지난 6월 자국의 화학공업업체인 UBE와 공동으로 태국에서 청정개발체제(CDM,선진국이 온실가스 감축 의무가 없는 개발도상국에서 감축 사업을 수행해서 그 실적의 일부를 선진국의 감축량에 반영하는 체제)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미쓰비시상사는 이를 통해 탄소배출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복잡한 규정을 뚫고 온실가스 저감 실적을 UN에서 인증받는 노하우를 갖고도 돈을 벌 계획을 하고 있다. 이 회사는 같은 방식으로 한국에서도 사업을 벌이고 있다. H기업의 화학공장에 온실가스 감축시설을 공동으로 설치한 뒤 그 대가를 돈 대신 탄소배출권으로 받아간 것이다.

◆의무감축국 지정 기다리면 늦다

한국은 아직 교토의정서에 따른 법적 의무를 부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서 멕시코와 함께 온실가스 감축 압력을 받고 있다. 2013년부터 온실가스를 줄여야 하는 '2차 의무감축 대상국'이 되거나 아니면 자율감축 프로그램을 시행해야 할 필요성이 높다. 그런데도 국내에선 기후변화 이슈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묻혀가고 '본격적인 규제가 시작되면 행동에 나서면 된다'는 논리가 대세를 얻고 있다.

우리 스스로 감축 목표를 제시하는 조치가 자기 발에 족쇄를 채우는 꼴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기후변화협정 관련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 내려면 소극적인 자세로 있는 게 낫다는 얘기다. 그러나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엄청난 기회를 잃는 함정이다.

기후변화협약에 줄곧 반대해온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 세계 이산화탄소의 4분의 1 정도를 내뿜으면서도 교토의정서에 참여하지 않았던 미국이 180도 달라졌다. 오바마 정부는 향후 10년간 1500억달러를 투입해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의 80% 수준까지 낮추기로 했다. 다른 나라보다 앞선 탄소저감 기술로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면서 청정 에너지 분야에서 일자리도 만든다는 양수겸장을 노리는 것이다. 일본과 영국을 비롯한 주요 유럽 선진국들도 기후변화협약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녹색 비즈니스'를 선점하기 위해 한발 앞서 뛰고 있다. 미국이 나섰다는 것은 미국 기업들이 세계를 장악할 준비를 끝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이것이 바로 미국의 새로운 세계 경제 재편 전략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주도할 것이냐 끌려갈 것이냐

녹색경제를 주도하느냐 끌려다니느냐는 역시 '탄소배출권 확보'와 '그린산업 원천기술 보유'에 달려 있다. 한국이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지기 전이라도 개별 기업 차원에서 CDM 사업을 진행해 인증을 받으면 탄소배출권을 받을 수 있고 배출권 거래제도(ET)를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여건이 이미 조성돼 있다.

앞으로는 공장에서 기계를 교체하거나 가정에서 가전제품을 새것으로 바꿀 때도 친환경 제품을 사용해 탄소배출량이 줄었다면 일일이 그에 합당한 경제적 보상을 받게 되는 시스템이 갖춰질 것이란 예상이다.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시범 실시하고 있는 '탄소 포인트 제도'가 그 출발점이다. 박소윤 삼정KPMG 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탄소를 사고파는 시대,탄소로 물건을 결제하는 시대가 곧 도래한다"며 "사소한 배출량 감축 실적이라도 증거를 남겨서 나중에 배출권을 인정받는 근거로 삼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원천기술 보유도 중요하다. 탄소배출권 거래 시장이 정착되면 각종 친환경 기술 가치가 지금보다 배는 높아질 것이다. 환경 관련,신재생 에너지 관련 원천기술의 사용 대가도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원천기술의 개발과 보급,그리고 시장화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시켜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