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이영관 도레이새한사장‥800명 직원이름 다 외우는 '형님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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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도레이도 반한 '섬유·첨단소재 박사'로
이영관 도레이새한 사장(63)은 사람들과 악수하기를 좋아한다. 방금 악수하고 돌아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다시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진심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악수와 같은 스킨십이라는 생각에서다.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큰형 같은 인자한 인상과 구수한 말투.악의를 갖고 덤벼드는 사람도 금세 무장해제시킬 듯한 편안함은 그가 가진 매력 중 하나다. 사람 좋아하는 천성까지 타고났으니 곁에는 늘 사람이 모여들 수밖에 없다.
1999년 출범한 한 · 일 합작법인 도레이새한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10년째 사령탑을 맡고 있는 그는 동종업계 최장수 최고경영자(CEO)다. 지난 2월 일본 도레이 한국 대표로 선임돼 한국에 진출한 6개 도레이 관계사의 총괄 대표를 맡고 있는 등 도레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다. 외자 합작법인 CEO로 성공신화를 써가고 있는 경영철학의 핵심은 역시 '사람'이다. 사람 간의 화합과 신뢰는 자동차의 앞뒤 바퀴와 같아서 어느 한쪽이라도 기울어지거나 망가지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게 그의 인생관이다.
◆소방관을 꿈꾼 목재소 큰아들
어릴 적 꿈은 소방관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대전에서 운영하던 제재소가 화재로 큰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가졌던 꿈이다.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자식처럼 아끼던 제재소를 5남매의 장남인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대전에서 가장 큰 제재소를 가졌던 아버지 덕에 '부잣집 아들'이란 소리를 들으며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상황이 급반전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아버지가 신규 사업지 답사를 위해 막역한 고향 친구 4명과 전라도 무주로 가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아버지 소유의 스리쿼터(4분의 3t 군용트럭)가 태봉산을 오르던 중 절벽 아래로 굴렀다. 조수석에 탔던 아버지는 목숨을 구했지만 형제 같은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사건 직후 아버지는 제재소 집 등 전 재산을 정리해 4등분한 뒤 세상을 떠난 친구 가족들에게 나눠줬다.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낸 것이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자신의 몫을 남기지 않은 아버지는 처자식을 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떠났다. 2년 뒤 파주 문산에 자리를 잡은 아버지가 다시 가족을 불러모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 사장은 "아버지를 평생 생각하며 살다보니 내것만 챙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상대방과 논쟁이 붙었을 때 90%는 양보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모두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 근무가 천직
대학 전공은 화학공학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1967년 당시는 정부가 석유화학 산업을 국가 기간사업으로 집중 육성하던 때라 취직이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3년 대학 졸업과 함께 제일합섬에입사했다. 이상대 삼성물산 부회장이 제일합섬 입사 동기,김징완 삼성중공업 부회장,이수창 삼성화재 사장이 삼성 공채 14기 동기다.
경산공장 기술연구소에서 3개월 연수를 마친 뒤 곧바로 구미 사업장에 배치됐다. 구미 1공장을 짓고 있던 시기인 탓에 말이 대졸 신입사원이지 하는 일은 현장 건설인부나 마찬가지였다. 매일 새벽 6시면 기숙사에서 나와 발목까지 올라오는 워커를 신고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선 선후배가 따로 없었다. 일본 도레이에서 도입한 기술 자료를 검토하는 일은 입사 1년도 안 된 그의 몫이었다.
1976년 공장이 완공된 뒤에는 안정적인 공장 가동을 위해 대졸 직원들이 공장 운영 직원들과 함께 3교대 현장 근무에 투입됐다.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근무하고도 다시 철야 근무에 투입돼 쪽잠을 자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이 사장은 "지금 돌이켜보면 입사 후 3년 동안의 고생이 가장 큰 재산이 됐다"며 "현장 근무의 생리를 이해하고 책으로만 접했던 기술 지식을 체득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회상했다.
이후 1984년 폴리에스터필름 공장을 처음 가동해 생산이 안정화되기까지 5년간은 사택에서 자는 날보다 공장 현장에서 직원들과 뒤엉켜 보내는 날이 많았다. 이 사장 스스로 "완전히 필름에 미쳐 있었다"고 말하는 시기였다.
입사 20년 만인 1992년 서울 본사 기획실로 발령받았지만 현장 근무가 천직이었는지 2년 만인 1994년 이사 승진과 함께 구미로 내려갔다. 4000억원을 투자해 짓는 구미2공장 건설의 총책임자로 이 사장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회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현장 밀착형 CEO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사장은 전형적인 현장형 CEO다. 직원들과 몸을 부대끼며 쌓은 현장 경험만 26년이다. 신입사원 시절 참여한 구미1공장의 기계 밸브 위치까지 기억할 정도로 현장을 꿰뚫고 있다. 30년 전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하며 터득했던 생산공정 다이어그램도 그대로 복기할 수 있을 정도다.
현재 회사의 임직원은 총 1000여명.직원 수가 800여명이던 시절까지 직원들 이름 하나하나를 다 외웠다. 지금도 격주로 공장에 내려가면 직원들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헷갈릴 때도 있지만 생각나는 대로 그냥 불러본다. 이 사장은 "설사 이름을 잘못 불렀어도 직원들이 그냥 '요즘 이 선배가 바쁘시구나'하고 이해해준다"고 말했다.
구미 공장 수지생산부장을 맡던 시절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직원들이 모여들어 그의 사택 문턱이 닳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두 살 아래 부인은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두세 달치 건어물 안주를 공수해 오는 게 일상사가 됐을 정도다. 이 사장은 "결혼하고 부장 직함을 달 때까지 현장직원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느라 집에 한 번도 월급을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며 "아무 불평 없이 자신의 교사 월급으로 생활비를 댔던 부인에게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수십 년간 몸으로 직접 터득한 현장이라 회사 어느 직원보다 현장을 잘 알고 있다. 투자 결정 등 각종 의사결정이 빠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사장은 현장을 너무 잘 알아 직원들이 피곤해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한테 보고를 하는 직원들의 부담은 그때그때 순간적인 것"이라며 "직원들이 받는 진짜 스트레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CEO가 갈팡질팡하며 의사결정을 미룰 때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적자기업 살린 승부사
이 사장은 작년 일본 도레이 본사의 전임이사 직함을 달았다. 도레이의 124개 해외 진출 기업 CEO 중 본사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상근임원이 된 것은 이 사장이 유일하다. 그가 도레이 본사의 전임이사 자리를 꿰찰 만큼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이유는 '눈부신' 경영실적 때문이다. 도레이새한은 1999년 합작 당시 380억원 적자 기업에서 이듬해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올해 매출액은 2000년 매출(4325억원)의 두 배 이상인 9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실적 호전은 전자소재 분야 신규 사업 진출 등 이 사장의 승부사적 판단이 주효했다. 2002~2003년 전 세계 전자회사들이 앞다퉈 액정표시장치(LCD) TV 개발에 나서는 것을 보고 LCD용 필름 개발에 발빠르게 뛰어들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2005년 이후 LCD용 필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회사 주력 사업도 정보기술(IT) 소재로 탈바꿈했다. 작년 매출액 8400억원 중 섬유 비중은 35%에 그친 반면 디스플레이 재료와 폴리에스터필름 등 소재 분야 매출은 65%에 달했다.
이 사장은 "취임 직후 직원들에게 약속한 1조원 매출 달성은 내년이면 가능할 것 같다"며 "창사 10주년을 맞아 지속적인 회사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 미래 비전과 신성장사업 마련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
큰형 같은 인자한 인상과 구수한 말투.악의를 갖고 덤벼드는 사람도 금세 무장해제시킬 듯한 편안함은 그가 가진 매력 중 하나다. 사람 좋아하는 천성까지 타고났으니 곁에는 늘 사람이 모여들 수밖에 없다.
1999년 출범한 한 · 일 합작법인 도레이새한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10년째 사령탑을 맡고 있는 그는 동종업계 최장수 최고경영자(CEO)다. 지난 2월 일본 도레이 한국 대표로 선임돼 한국에 진출한 6개 도레이 관계사의 총괄 대표를 맡고 있는 등 도레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다. 외자 합작법인 CEO로 성공신화를 써가고 있는 경영철학의 핵심은 역시 '사람'이다. 사람 간의 화합과 신뢰는 자동차의 앞뒤 바퀴와 같아서 어느 한쪽이라도 기울어지거나 망가지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게 그의 인생관이다.
◆소방관을 꿈꾼 목재소 큰아들
어릴 적 꿈은 소방관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대전에서 운영하던 제재소가 화재로 큰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가졌던 꿈이다.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자식처럼 아끼던 제재소를 5남매의 장남인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대전에서 가장 큰 제재소를 가졌던 아버지 덕에 '부잣집 아들'이란 소리를 들으며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상황이 급반전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아버지가 신규 사업지 답사를 위해 막역한 고향 친구 4명과 전라도 무주로 가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아버지 소유의 스리쿼터(4분의 3t 군용트럭)가 태봉산을 오르던 중 절벽 아래로 굴렀다. 조수석에 탔던 아버지는 목숨을 구했지만 형제 같은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사건 직후 아버지는 제재소 집 등 전 재산을 정리해 4등분한 뒤 세상을 떠난 친구 가족들에게 나눠줬다.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낸 것이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자신의 몫을 남기지 않은 아버지는 처자식을 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떠났다. 2년 뒤 파주 문산에 자리를 잡은 아버지가 다시 가족을 불러모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 사장은 "아버지를 평생 생각하며 살다보니 내것만 챙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상대방과 논쟁이 붙었을 때 90%는 양보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모두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 근무가 천직
대학 전공은 화학공학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1967년 당시는 정부가 석유화학 산업을 국가 기간사업으로 집중 육성하던 때라 취직이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3년 대학 졸업과 함께 제일합섬에입사했다. 이상대 삼성물산 부회장이 제일합섬 입사 동기,김징완 삼성중공업 부회장,이수창 삼성화재 사장이 삼성 공채 14기 동기다.
경산공장 기술연구소에서 3개월 연수를 마친 뒤 곧바로 구미 사업장에 배치됐다. 구미 1공장을 짓고 있던 시기인 탓에 말이 대졸 신입사원이지 하는 일은 현장 건설인부나 마찬가지였다. 매일 새벽 6시면 기숙사에서 나와 발목까지 올라오는 워커를 신고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에선 선후배가 따로 없었다. 일본 도레이에서 도입한 기술 자료를 검토하는 일은 입사 1년도 안 된 그의 몫이었다.
1976년 공장이 완공된 뒤에는 안정적인 공장 가동을 위해 대졸 직원들이 공장 운영 직원들과 함께 3교대 현장 근무에 투입됐다.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근무하고도 다시 철야 근무에 투입돼 쪽잠을 자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이 사장은 "지금 돌이켜보면 입사 후 3년 동안의 고생이 가장 큰 재산이 됐다"며 "현장 근무의 생리를 이해하고 책으로만 접했던 기술 지식을 체득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회상했다.
이후 1984년 폴리에스터필름 공장을 처음 가동해 생산이 안정화되기까지 5년간은 사택에서 자는 날보다 공장 현장에서 직원들과 뒤엉켜 보내는 날이 많았다. 이 사장 스스로 "완전히 필름에 미쳐 있었다"고 말하는 시기였다.
입사 20년 만인 1992년 서울 본사 기획실로 발령받았지만 현장 근무가 천직이었는지 2년 만인 1994년 이사 승진과 함께 구미로 내려갔다. 4000억원을 투자해 짓는 구미2공장 건설의 총책임자로 이 사장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회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현장 밀착형 CEO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사장은 전형적인 현장형 CEO다. 직원들과 몸을 부대끼며 쌓은 현장 경험만 26년이다. 신입사원 시절 참여한 구미1공장의 기계 밸브 위치까지 기억할 정도로 현장을 꿰뚫고 있다. 30년 전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하며 터득했던 생산공정 다이어그램도 그대로 복기할 수 있을 정도다.
현재 회사의 임직원은 총 1000여명.직원 수가 800여명이던 시절까지 직원들 이름 하나하나를 다 외웠다. 지금도 격주로 공장에 내려가면 직원들 이름을 부른다. 이름이 헷갈릴 때도 있지만 생각나는 대로 그냥 불러본다. 이 사장은 "설사 이름을 잘못 불렀어도 직원들이 그냥 '요즘 이 선배가 바쁘시구나'하고 이해해준다"고 말했다.
구미 공장 수지생산부장을 맡던 시절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직원들이 모여들어 그의 사택 문턱이 닳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두 살 아래 부인은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두세 달치 건어물 안주를 공수해 오는 게 일상사가 됐을 정도다. 이 사장은 "결혼하고 부장 직함을 달 때까지 현장직원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느라 집에 한 번도 월급을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며 "아무 불평 없이 자신의 교사 월급으로 생활비를 댔던 부인에게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수십 년간 몸으로 직접 터득한 현장이라 회사 어느 직원보다 현장을 잘 알고 있다. 투자 결정 등 각종 의사결정이 빠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사장은 현장을 너무 잘 알아 직원들이 피곤해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한테 보고를 하는 직원들의 부담은 그때그때 순간적인 것"이라며 "직원들이 받는 진짜 스트레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CEO가 갈팡질팡하며 의사결정을 미룰 때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적자기업 살린 승부사
이 사장은 작년 일본 도레이 본사의 전임이사 직함을 달았다. 도레이의 124개 해외 진출 기업 CEO 중 본사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상근임원이 된 것은 이 사장이 유일하다. 그가 도레이 본사의 전임이사 자리를 꿰찰 만큼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이유는 '눈부신' 경영실적 때문이다. 도레이새한은 1999년 합작 당시 380억원 적자 기업에서 이듬해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올해 매출액은 2000년 매출(4325억원)의 두 배 이상인 9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실적 호전은 전자소재 분야 신규 사업 진출 등 이 사장의 승부사적 판단이 주효했다. 2002~2003년 전 세계 전자회사들이 앞다퉈 액정표시장치(LCD) TV 개발에 나서는 것을 보고 LCD용 필름 개발에 발빠르게 뛰어들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2005년 이후 LCD용 필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회사 주력 사업도 정보기술(IT) 소재로 탈바꿈했다. 작년 매출액 8400억원 중 섬유 비중은 35%에 그친 반면 디스플레이 재료와 폴리에스터필름 등 소재 분야 매출은 65%에 달했다.
이 사장은 "취임 직후 직원들에게 약속한 1조원 매출 달성은 내년이면 가능할 것 같다"며 "창사 10주년을 맞아 지속적인 회사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 미래 비전과 신성장사업 마련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