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법의 개정 방향을 놓고 기획재정부(옛 재무부)와 한국은행이 갈등을 빚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재정부와 한은의 골은 50여년 전부터 파이기 시작했다. 갈등의 핵심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금융회사에 대한 감독권한을 한은에 부여할지 여부와 한은의 독립성이었다. 갈등이 워낙 심하다 보니 한은 임직원들과 학계까지 들고 일어나는 일까지 생겨 정부 고위 인사들과 한은 총재가 옷을 벗는 파동 수준으로 번지기도 했다.

한은법은 1950년 제정됐다.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은 재무부 장관이 겸임했지만 금통위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쟁복구가 어느 정도 이뤄지자 재무부는 금융정책에 대한 최종 책임을 정부에 귀속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은법 개정을 주장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어서 재무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5 · 16군사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정부는 정부 주도 성장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1962년 한은법을 개정했다. 금융정책의 최종 책임을 재무부에 두고 재무부가 한은의 내부경영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한 것이 골자다. 이때부터 한은은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기 시작했다. 은행감독부는 은행감독원으로 격상돼 한은 밑에 배치됐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1977년 한은법 개정이 다시 논의되자 재무부는 은행감독원에 대한 정부 통제를 주장했고 1982년 장영자 · 이철희 어음사기사건이 발생하자 은감원을 한은에서 떼어내 증권감독원 및 보험감독원과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여론의 반대로 이 같은 주장은 파묻히고 한은 예산을 자체적으로 수립하도록 해 내부경영의 독립성을 높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1994년 5월과 1995년 2월엔 경제학자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논의는 1997년 들어서야 본격 시작됐다. 한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금통위 의장을 재정경제원 장관에서 한은 총재로 바꿔 독립성을 높이는 대신 은감원을 한은에서 떼어내 독립적인 통합감독원을 만들자는 것이 정부 안이었다. 한은에선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은감원을 떼어내는 것은 통화신용정책을 펴는 데 큰 문제가 있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 기획부장이었던 이성태 현 한은 총재는 독자적인 반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때마침 외환위기가 불거지고 한은법이 처리되지 못하자 강경식 재경원 장관과 김인호 경제수석이 11월 옷을 벗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할 정도로 위기상황이 악화되자 갈등은 봉합되고 정부안대로 12월 말 한은법 개정안은 통과됐다.

재정부와 한은은 금융회사 감독권 혹은 조사권에 대해 출발부터 견해가 양극으로 갈려 있어 해결이 쉽지 않다. 재정부는 감독권이나 조사권은 성문법 체계를 갖고 있는 한국의 경우 정부(공무원)만 행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민간인인 한은 임직원들이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은은 통화신용정책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금융회사에 대해 최종적으로 자금을 대출해 주는 중앙은행이 이 권한을 갖는 것은 법 체계와 관계없이 당연하면서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지난해 외화유동성 위기가 터진 근본 원인이 은감원이 한은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을 원래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통합감독원이 생긴 만큼 이렇게는 어렵고 한은이 단독조사권을 가져야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게 한은의 생각이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