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휴대폰과 노트북에 사용되는 배터리(2차전지)는 고온이나 충격을 받으면 폭발할 수 있다. 배터리를 구성하는 고체 상태의 리튬이온과 액체 상태의 전해질이 고온 등 극한 상황에선 분리막 파열 등으로 뒤섞이면서 격렬한 화학반응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경기도 오산시 서랑동에 있는 신흥SEC는 2차전지 핵심 부품인 폭발방지 안전변(safe valve)을 만든다. 단 한 차례의 폭발 사고도 부품제조업체는 물론 배터리 메이커들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안길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전변 제조기술은 2차전지의 핵심 공정으로 손꼽힌다. 삼성 협력업체인 이 회사는 삼성SDI가 노트북용 배터리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안전변 물량의 90%를 납품하고 있다.

신흥SEC는 1979년 부산에서 신흥정밀이란 오디오부품 제조업체로 출발했다. 삼성NEC(삼성SDI 전신) 입사 동기였던 최화봉 회장(69)과 김점룡 회장(70)이 공동 창업한 이 회사는 올해로 동업 30년째를 맞고 있다. 지난 7월1일 최 회장의 셋째사위 황만용 대표(45)와 김 회장의 장남인 김기린 대표(45)가 경영권을 공동 승계,동업 전통을 2대로까지 이어가고 있다.

생산개발부 기술자였던 최 회장은 현장에서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데다,대우도 신통하지 않다고 판단, "이럴 바엔 내 회사를 차리는 게 낫겠다"며 독립을 결심했다. 비슷한 고민을 하던 김 회장이 동업을 제의해 와 각자 1000만원씩을 투자해 165㎡(50평)규모의 임대공장을 차렸다. 당시 1000만원은 43㎡(15평) 아파트 두 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초기에는 전 직장의 인맥을 통해 오디오 부품을 납품하면서 공장을 근근이 꾸려나갔다. 삼성NEC에서 재료를 받아 소량의 오디오부품을 단순 임가공해 납품하다보니,적자만 간신히 면하는 수준이었다. 직원 10~15명의 월급과 공장임대료,제품원료비를 빼고나면 남는 돈이 한푼도 없었다. 김 회장은 "돈 벌려고 회사를 차렸는데,창업 후 3년 동안 집에 돈을 가져다 준 기억이 없다"고 회고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신흥정밀은 1982년 4월께 수원으로 공장을 옮겨갔다. 삼성전자가 있는 수원 인근으로 가면 일거리도 많고,물류비를 줄일 수 있어 이익이 늘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원으로 옮겨간 1년 동안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전락해 1년 동안 공장을 멈춰 세운 채 허송세월만 보내야 했다. 오디오산업이 점차 사양기로 접어든 데다,수원으로 공장을 이전한 후 전 직장인 삼성NEC의 주문도 끊겼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컬러TV 브라운관 부품제조로 업종을 바꿨다.

최 회장은 제품 개발에 착수하는 한편 김 회장은 삼성전관의 공장 문턱이 닳도록 영업에 나섰다. 전 세계 컬러TV 시장이 팽창하면서 업종 전환은 성공을 거뒀다. 지금은 철수했지만 폭증하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2003년에는 중국 둥관에 컬러TV 부품공장을 차렸을 정도였다.

연매출 40억~50억원대의 신흥SEC가 제2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2차전지 분야로 업종을 재전환한 덕분이었다. 이 회사는 2000년 삼성SDI가 제공한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연구개발에 착수,2차전지 안전변 제조에 성공했다. 최 회장은 "2차전지 사업에서 삼성SDI의 독점 공급권을 따내고 지금까지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신흥SEC가 보여준 기술력과 납기를 준수해온 신뢰 등이 밑바탕이 됐다"고 강조했다.

신흥SEC는 2차전지시장의 팽창으로 지난해 매출 200억원을 넘어서 기술집약형 중견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 매출목표는 240억원.

지난 7월 경영권이 창업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면서 신흥SEC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최 회장의 셋째 사위 황 대표는 CJ의 일본 주재원 등 직장 생활을 하던 중 2003년 신흥SEC의 중국 사업 책임자로 합류했다. 최 회장의 첫째 사위와 둘째 사위는 모두 교직에 있어 황 대표가 동업 전통을 잇기 위한 적임자로 선택된 것.공동대표인 김 대표는 1987년 서울산업대 금형설계과를 졸업하고 신흥SEC 입사 후 회사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렇다면 오디오부품 임가공업체에서 첨단 2차전지 부품제조업체로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부침을 겪으면서도 신흥SEC가 30년 동업에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최 회장과 김 회장은 철저한 금전관리 및 역할 분담을 꼽았다.

김 회장은 "모든 분쟁은 결국 돈 때문에 생긴다"며 "우리는 30년 동안 돈 문제로 얼굴을 붉힌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매달 장부를 서로 '크로스체크'하는 것은 기본이고,회사의 공식적 접대 등 술자리도 반드시 함께 참석하는 것을 30년째 철칙으로 삼고 있다.

창업 후 최 회장은 개발 생산 인원관리만을 맡고,김 회장은 영업 납품 구매 분야로 역할을 나눴다. 이 같은 임무 분담은 2세 CEO(최고경영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됐다. 대신 최 회장 사위인 황 대표는 김 회장의 업무를,김 회장 아들인 김 대표는 최 회장 역할을 맞바꾸기로 했다. 김 회장은 "둘의 장기와 전공을 우선 고려했지만,동업자 정신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양 집안의 역할을 바꾼 측면도 있다"고 귀띔했다.

신흥SEC는 2차전지 분야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떠오른 자동차용 배터리 부품시장의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오산=손성태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