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상인으로 개성상인을 꼽는다. 고려에서 시작해 구한말까지 명맥을 이어온 저력있는 상인집단이다. 개성상인은 우리나라 상업사에 기억할만한 흔적들을 남겼다. 서양보다 200년 앞서 복식부기인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置簿法)을 사용한 것과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라도 반드시 다른 상가(商家)에서 다년간의 수습을 거친 뒤 가업을 이어받도록 한 차인제(差人制)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상인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바로 동료와 공동체를 배려하는 정신 때문이다. 개성상인들이 이러한 정신을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시변(時邊) 제도이다. 신용만 확실하면 별다른 조건 없이 어려운 상인은 물론 이웃에도 돈을 빌려주었다. 시변제도는 단순한 무담보 금전거래가 아니라 동료상인과 지역사회를 위한 공존의 정신이자 상생의 이념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1000년의 맥을 이어온 교토상인이 있다. 그들은 상품과 서비스 질을 개선하고자 하는 확고한 상인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자기혁신 노력이야말로 교토상인이 지역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그들이 일본의 대표적 상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동료와의 신의,공동체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정신 때문이다. 교토상인들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고객과 거래처,그리고 지역공동체와의 신의나 의리를 먼저 생각하려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최근 기업형 슈퍼마켓인 SSM(슈퍼 슈퍼마켓)의 지역 상권 진출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일고 있다. 대형 유통기업은 SSM 진출문제를 시장원리에 따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자의 선택을 제한해서는 곤란하며 유통업체가 좋은 상품을 싸게 팔아 고객에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중소유통업계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맡고 있는 영역까지 대기업이 들어오는 것은 지나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애초부터 경쟁이 될 수 없는 상대와 경쟁하라는 것은 시장의 횡포이며 따라서 어느 정도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양측의 입장과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지금 누구의 주장이 옳고 누구의 주장이 그른지를 밝히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SSM 문제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고 시시비비의 대상을 넘어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서로가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해 상생의 길을 찾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본다.

소비자 후생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고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파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는 사람에게도 이롭고 더 나아가 세상도 이롭게 하는 옛 상인정신이 새삼 아쉬운 때이다. 온고지신이라고나 할까. 옛 상인들이 보여준 자기혁신의 노력,호혜의 정신,그리고 상생의 도를 오늘에 되살려 봄직하다. SSM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을 보면서 새로운 상도 탄생을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상열 대한상공회의소상근부회장 sangyeolkim@korcha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