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인터넷은 세계화의 총아였다.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정부나 국경은 결국 세계화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는 전망이 한동안 주류적 비전처럼 풍미했다. 세계화 이론은 영토기반 정부가 사라지고 있다거나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믿음과 함께 모든 것이 동질화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확산시켰다. 인터넷은,토머스 프리드먼이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예측한 대로,세계를 점점 더 작고 가깝게 만드는 세계화 시스템의 촉매이자 거대한 조임쇠(vise)로 작동할 것으로 예상됐다. 최근 오바마노믹스와 MB표 녹색성장의 화두를 던진 것으로 알려져 다시금 유명해진 프리드먼은 실은 이 같은 인터넷 낙관론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2005년 나온 '세계는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라는 책에서 인터넷과 관련 기술이 어떻게 우리 모두를 이웃으로 만들고 지역이나 거리,언어의 차이를 사라지게 하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가 예상대로 평평해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빈부격차의 심화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 세계화의 폐단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그 조임쇠였던 인터넷부터 예상을 빗나가기 시작했다. 영토기반 정부와 그 물리적 강제력이 날로 그 영향력을 증대해 왔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아무도 못 막는다'는 기술운명론은 기술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했다. 프랑스는 야후로 하여금 나치 관련 물품의 거래를 금지시켰고,호주는 자국민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다우존스에 벌금을 물렸으며,미국은 안티구아를 상대로 인터넷 도박을 차단했다.

영토기반 정부의 쇠퇴와 탈경계화에 대한 인터넷 낙관론자들의 전망이 빗나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각국의 정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막강한 세력과 자신감으로 무장한 중국이 자국 국경 안에 민족주의 성향의 인터넷을 만들어 가면서 언어뿐 아니라 가치관과 근본 아키텍처 면에서도 서구의 인터넷과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는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있는 모습은 어이없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인터넷의 정부의존성을 당위로 받아들이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더러는 이베이(eBay)나 아마존닷컴 같은 온라인 기업들은 정부와 법질서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존속조차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의를 환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부개입과 통제강화의 요구를 일반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촉진하고 인터넷 중립성 제고를 위해 조만간 새로운 인터넷서비스사업자(ISP) 규제책을 발표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인터넷 중립성은 오바마 대통령이 강조해 온 선거공약이었다. 투자위축 등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둘러싼 논란도 없지 않지만,사이버모독죄 등 각종 인터넷 규제의 도입과 강화에 부심해 온 우리 정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인터넷이 그리는 미래는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무엇보다도 영토기반 정부의 영향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의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된 모델에서부터 중국식 정치 통제모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띤다. 중국식 정부통제 모델은 우리가 지향해 온 사상과 의견의 자유시장 모델과는 거리가 멀다. 인터넷에 대한 정부통제의 강화는 '해방구' 인터넷을 옥죄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추구해온 근본적 가치 그 자체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이 정치적 반대와 저항의 거점으로 이용된다는 이유로 정부통제를 강화하는 입법의 칼을 들이대는 발상이 위험한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바라는가. 칼을 휘두르기 전에 그 칼로 무엇을 베게 될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