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위원장에 취임 후 일선 현장의 업무파악을 위해 상담소에서 직접 상담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만난 40세 여성인 K씨에 관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필자와 마주 앉은 그녀는 말 없이 한동안 울기만 했다. 우는 동안 무수한 상념이 떠올랐으리라.병고에 시달리는 남편,끊임없이 계속 걸려오는 채권자들의 독촉 전화,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맑고 고운 눈망울들.필자도 눈물을 꾹 참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참을 운 후에 그녀는 맺혔던 한을 풀어내듯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당시 겪고 있던 어려움들을 풀어내며 조금씩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주 앉아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삶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빚을 완전히 해결한 사람들이 보낸 감사 편지를 읽을 때면 힘든 여정을 성실히 마친 그분들께 필자가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45살의 L씨는 처음 방문했을 때 상담을 기다리면서 안내책자에서 보았던 '빚에서 빛으로'라는 문구가 가장 인상적이었고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과연 자신이 다시 빛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고 주위에서는 손쉽게 파산을 신청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삶이 수포로 돌아가고 자신을 믿고 보증을 서줬던 지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패배자로 비쳐지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다고 한다.

채무조정을 받은 이후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다. 번 돈의 절반 이상을 꼬박 채무를 변제하는 데 사용했으며,명절에도 고향을 찾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가끔 전화로 아내와 아이들과 통화를 하는 것이 힘든 생활 중 유일한 낙이었다. 성실히 일한 결과 조그만 집도 얻었고 올 3월 마지막으로 변제금을 완납했다. 이들 모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과중한 채무를 지게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올 추석의 보름달은 더 크고 환하게 보일 것이다.

신용을 잃었다가 되찾은 중년의 L씨처럼 한 순간의 판단 착오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이땅의 금융소외자들이 건전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보람스러운 일이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미드라쉬'에 있는'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경구처럼 불행과 고통의 터널은 길고 험하지만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이다. L씨가 새롭게 찾은 빛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도 돌아갈 수 있도록 신용회복위원회가 최선을 다해 올 추석 보름달이 한숨과 한탄으로 얼룩지지 않고 희망을 상징하는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


홍성표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 ccrschairman@ccr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