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핑계의 기술‥회식 한번 빼먹으려면…친척은 한분씩 돌아가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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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는 時테크다 : 너무 잦은 핑계는 정작 급한 순간에 발목
부처님 손바닥 위! : 동료와 당구치다 거래처 다녀왔다 했더니
부처님 손바닥 위! : 동료와 당구치다 거래처 다녀왔다 했더니
전날 과음 탓이었을까. 알람소리도 듣지 못했다. 눈을 떠 보니 이미 출근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술이 덜 깬 상태에서도 김 과장의 머리는 바삐 돌아간다. '이실직고할까….아니야 지난주에도 술 먹고 늦었는데….' 김 과장이 선택한 것은 거래처 방문.김 과장은 팀장에게 전화해 거래처에 들렀다가 사무실에 들어가겠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웬걸.도무지 술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거래처에 가는 것도 결례라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덮여 오는 눈꺼풀도 거래처 옆에 있는 사우나로 이끈다. '어차피 늦은 것,간밤 취기나 말끔히 털어내자.' 점심시간이 다 돼서 보무도 당당히 사무실에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친 뒤 팀장에게 이러쿵저러쿵 거래처에 대해 얘기하는데,팀장이 한마디 한다. "이제 술 다 깼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음 직한 경험이다. 비단 지각만이 아니다. 괜스레 조퇴하고 싶거나,회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을 때,육두문자가 날아다니는 회의에 빠지고 싶을 때,근무 시간 중 '땡땡이'를 치고 싶을 때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 잔머리를 굴리는 게 김 과장,이 대리들이다.
◆친척은 다 죽었고 맞선은 100번 넘게 봤다
중견회사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박모 과장(36).아무래도 술자리가 잦은 그의 단골 레퍼토리는 '상갓집'이다. 지각하거나 일찍 튀고 싶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핑계가 "거래처 임원이 상을 당해서…"이거나 "친구가 부친상을 당해서…" 등이다. 친척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써먹는 핑곗거리다. 하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진짜 거래처 임원이 상을 당해도 믿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직도 거래처 임원 부모 중에 살아계신 분이 계시나?"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박 과장이 상사(喪事)를 단골메뉴로 사용하는 것은 그래도 가장 믿어준다는 경험 때문이다. 우리사회에는 상가엔 반드시 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하물며 영업사원인 바에야 말할 것도 없다.
'골드 싱글'인 대기업의 이모 과장(35)은 별명이 '툭하면 맞선'이다. 가기 싫은 회식자리나 모임이 있으면 반드시 맞선을 본다며 빠져서 붙은 별명이다. "어머님이 어렵게 마련한 맞선자리라서 반드시 나가야 한다"고 우기면 어지간한 상사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선 핑계를 하도 많이 대다 보니 "맞선만 100번이 넘게 봤을 것"이라는 얘기를 동료로부터 듣기도 했다.
집안일도 직장인들에게 좋은 핑곗거리다. 유부남인 김모 대리(33)는 걸핏하면 "애가 아프다"고 둘러댄다. 자식이 앓는다는데 "회식 가기 싫어서 하는 소리구먼"이라고 도끼눈을 뜰 '비정한 상사'는 그리 많지 않다. 자식 핑계를 자주 댔다 싶으면 출산한 지 얼마 안돼 여기저기 아픈 아내를 내세운다.
◆핑계도 기술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과장(34)은 업무 중 개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다. 이직하기로 맘먹었기 때문이다. 헤드헌터 2명에게 새로운 직장을 부탁해놓은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꼴로 면접이 잡혀 있다. 처음엔 면접 일정을 하루에 몰고 월차를 사용했다. 이제는 월차도 다 소진해버려 새로운 핑곗거리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그가 면접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창조해낸 건 불면증 치료.김 과장은 일주일에 한 번 수면클리닉에서 심리 상담을 받는다는 '독창적인' 핑계를 대고 점심 시간을 포함해 자유시간 두 시간을 얻어냈다. 병원에 간다고 하는 날마다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나타나야 하는 게 옥에 티이긴 하지만 말이다.
능수능란한 땡땡이 기술로 지인들 사이에서 '태업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대기업의 영업사원 최모씨(29)는 "대범함이 최고"라고 귀띔했다. 최씨의 비결은 '당황하지 말고,티를 내지 말고,알리바이를 만들고,꼭 해야 할 일은 미리 해두고'다. 그는 한가롭게 택시로 이동하는 도중 상사의 전화가 걸려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택시기사에게 라디오 방송과 내비게이션 소리를 줄여 달라고 한 다음 유유히 전화를 받는다. 즐겁게 땡땡이를 치고 회사에 들어온 뒤에도 마찬가지다. 상사가 하루 일과를 다그쳐 물으면 최근 실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일을 이야기하며 '현실에 기반한' 거짓말을 한다. 상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핑계는 남발하지 않아야 약발이 있다
대기업 마케팅 부서의 정모 대리(30)는 웬만해선 핑계를 대지 않는다. 지각을 하더라도 "늦잠 잤습니다"라고 이실직고한다. 업무가 부진하면 몸으로 때운다. 남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빠지려 하는 회식자리도 씩씩하게 지킨다. 윗사람이 보면 '쿨 가이(cool guy)'고 동료들이 보면 꽉 막힌 사람이다.
그렇다고 정 대리가 모범사원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구차하게 핑계 대기를 싫어해서도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기 위해서다. 핑계를 너무 자주 써먹으면 정작 필요한 때에 약발이 떨어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말 너무 늦게 나왔거나,친구들과의 신나는 저녁자리에 빠지고 싶지 않을 때 핑계를 써먹으면 반드시 통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 평소 상사에게 '든든한 부하'라든가,'핑계 대지 않을 친구'라는 이미지를 심어놓는 게 중요하다. 정 대리는 "핑계도 미리 투자해야 약발이 있다"고 말했다.
◆상사는 알고 있다,다만 속아줄 뿐
외국계 IT(정보기술) 회사 사원 성모씨(28)는 땡땡이를 간파한 '높으신 분'의 비웃음만 생각하면 지금도 쥐구멍에 기어들어가고 싶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 무렵 직장 동료들과 접선해 당구를 즐기던 성씨.문제의 그날은 이상할 만큼 내기 당구에 불이 붙었다. 점심시간에 시작된 당구판이 끝난 건 오후 4시쯤.부랴부랴 회사에 복귀하자 "왜 이렇게 늦었냐?"는 호통이 떨어졌다. 거래처를 방문했다고 둘러대자 높은 분이 피식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초크가루나 털고 일하셔!" 아뿔싸.게임 중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식히기 위해 양복 윗도리를 벗어둔 게 화근이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당구장의 상징인 새파란 초크가루가 묻어 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럴듯한 핑계로 상사를 멋지게 속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상사는 안다. 누가 핑계를 대고 있고,누가 진실을 얘기하는지를.대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차장(42)도 땡땡이를 치고 들어온 후배들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반질반질한 얼굴로 오후에 들어와 거래처를 돌고 왔다는 후배,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해 장이 갑자기 꼬여 출근을 못하겠다는 후배,친한 친구가 상(喪)을 당해 회식에 빠지겠다고 말하는 후배 등을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흘러 나온다.
김 차장은 "쫄병시절 선배들에게 각종 핑계를 댔기 때문에 후배들의 목소리만 들어도,눈빛만 봐도 거짓 여부를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속아 넘어가는 척 해준다"고 말했다. 왜냐고 묻자 "선배들도 그렇게 해줬기 때문"이라며 껄껄 웃었다.
이고운/정인설/이관우/이정호/김동윤 기자 ccat@hankyung.com
그런데 웬걸.도무지 술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거래처에 가는 것도 결례라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덮여 오는 눈꺼풀도 거래처 옆에 있는 사우나로 이끈다. '어차피 늦은 것,간밤 취기나 말끔히 털어내자.' 점심시간이 다 돼서 보무도 당당히 사무실에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친 뒤 팀장에게 이러쿵저러쿵 거래처에 대해 얘기하는데,팀장이 한마디 한다. "이제 술 다 깼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음 직한 경험이다. 비단 지각만이 아니다. 괜스레 조퇴하고 싶거나,회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을 때,육두문자가 날아다니는 회의에 빠지고 싶을 때,근무 시간 중 '땡땡이'를 치고 싶을 때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 잔머리를 굴리는 게 김 과장,이 대리들이다.
◆친척은 다 죽었고 맞선은 100번 넘게 봤다
중견회사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박모 과장(36).아무래도 술자리가 잦은 그의 단골 레퍼토리는 '상갓집'이다. 지각하거나 일찍 튀고 싶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핑계가 "거래처 임원이 상을 당해서…"이거나 "친구가 부친상을 당해서…" 등이다. 친척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써먹는 핑곗거리다. 하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진짜 거래처 임원이 상을 당해도 믿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직도 거래처 임원 부모 중에 살아계신 분이 계시나?"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박 과장이 상사(喪事)를 단골메뉴로 사용하는 것은 그래도 가장 믿어준다는 경험 때문이다. 우리사회에는 상가엔 반드시 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하물며 영업사원인 바에야 말할 것도 없다.
'골드 싱글'인 대기업의 이모 과장(35)은 별명이 '툭하면 맞선'이다. 가기 싫은 회식자리나 모임이 있으면 반드시 맞선을 본다며 빠져서 붙은 별명이다. "어머님이 어렵게 마련한 맞선자리라서 반드시 나가야 한다"고 우기면 어지간한 상사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선 핑계를 하도 많이 대다 보니 "맞선만 100번이 넘게 봤을 것"이라는 얘기를 동료로부터 듣기도 했다.
집안일도 직장인들에게 좋은 핑곗거리다. 유부남인 김모 대리(33)는 걸핏하면 "애가 아프다"고 둘러댄다. 자식이 앓는다는데 "회식 가기 싫어서 하는 소리구먼"이라고 도끼눈을 뜰 '비정한 상사'는 그리 많지 않다. 자식 핑계를 자주 댔다 싶으면 출산한 지 얼마 안돼 여기저기 아픈 아내를 내세운다.
◆핑계도 기술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과장(34)은 업무 중 개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다. 이직하기로 맘먹었기 때문이다. 헤드헌터 2명에게 새로운 직장을 부탁해놓은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꼴로 면접이 잡혀 있다. 처음엔 면접 일정을 하루에 몰고 월차를 사용했다. 이제는 월차도 다 소진해버려 새로운 핑곗거리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그가 면접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창조해낸 건 불면증 치료.김 과장은 일주일에 한 번 수면클리닉에서 심리 상담을 받는다는 '독창적인' 핑계를 대고 점심 시간을 포함해 자유시간 두 시간을 얻어냈다. 병원에 간다고 하는 날마다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나타나야 하는 게 옥에 티이긴 하지만 말이다.
능수능란한 땡땡이 기술로 지인들 사이에서 '태업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대기업의 영업사원 최모씨(29)는 "대범함이 최고"라고 귀띔했다. 최씨의 비결은 '당황하지 말고,티를 내지 말고,알리바이를 만들고,꼭 해야 할 일은 미리 해두고'다. 그는 한가롭게 택시로 이동하는 도중 상사의 전화가 걸려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택시기사에게 라디오 방송과 내비게이션 소리를 줄여 달라고 한 다음 유유히 전화를 받는다. 즐겁게 땡땡이를 치고 회사에 들어온 뒤에도 마찬가지다. 상사가 하루 일과를 다그쳐 물으면 최근 실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일을 이야기하며 '현실에 기반한' 거짓말을 한다. 상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핑계는 남발하지 않아야 약발이 있다
대기업 마케팅 부서의 정모 대리(30)는 웬만해선 핑계를 대지 않는다. 지각을 하더라도 "늦잠 잤습니다"라고 이실직고한다. 업무가 부진하면 몸으로 때운다. 남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빠지려 하는 회식자리도 씩씩하게 지킨다. 윗사람이 보면 '쿨 가이(cool guy)'고 동료들이 보면 꽉 막힌 사람이다.
그렇다고 정 대리가 모범사원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구차하게 핑계 대기를 싫어해서도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기 위해서다. 핑계를 너무 자주 써먹으면 정작 필요한 때에 약발이 떨어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말 너무 늦게 나왔거나,친구들과의 신나는 저녁자리에 빠지고 싶지 않을 때 핑계를 써먹으면 반드시 통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 평소 상사에게 '든든한 부하'라든가,'핑계 대지 않을 친구'라는 이미지를 심어놓는 게 중요하다. 정 대리는 "핑계도 미리 투자해야 약발이 있다"고 말했다.
◆상사는 알고 있다,다만 속아줄 뿐
외국계 IT(정보기술) 회사 사원 성모씨(28)는 땡땡이를 간파한 '높으신 분'의 비웃음만 생각하면 지금도 쥐구멍에 기어들어가고 싶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 무렵 직장 동료들과 접선해 당구를 즐기던 성씨.문제의 그날은 이상할 만큼 내기 당구에 불이 붙었다. 점심시간에 시작된 당구판이 끝난 건 오후 4시쯤.부랴부랴 회사에 복귀하자 "왜 이렇게 늦었냐?"는 호통이 떨어졌다. 거래처를 방문했다고 둘러대자 높은 분이 피식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초크가루나 털고 일하셔!" 아뿔싸.게임 중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식히기 위해 양복 윗도리를 벗어둔 게 화근이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당구장의 상징인 새파란 초크가루가 묻어 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럴듯한 핑계로 상사를 멋지게 속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상사는 안다. 누가 핑계를 대고 있고,누가 진실을 얘기하는지를.대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차장(42)도 땡땡이를 치고 들어온 후배들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반질반질한 얼굴로 오후에 들어와 거래처를 돌고 왔다는 후배,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해 장이 갑자기 꼬여 출근을 못하겠다는 후배,친한 친구가 상(喪)을 당해 회식에 빠지겠다고 말하는 후배 등을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흘러 나온다.
김 차장은 "쫄병시절 선배들에게 각종 핑계를 댔기 때문에 후배들의 목소리만 들어도,눈빛만 봐도 거짓 여부를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속아 넘어가는 척 해준다"고 말했다. 왜냐고 묻자 "선배들도 그렇게 해줬기 때문"이라며 껄껄 웃었다.
이고운/정인설/이관우/이정호/김동윤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