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전 미국에서 지병으로 별세한 정몽구 현대 · 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의 부인 이정화 여사(71)는 현대가(家)의 실질적인 맏며느리로 평생 남편을 묵묵히 뒷바라지해왔다. "항상 겸손하고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시어머니 고(故) 변중석 여사의 가르침을 새기며 정 회장을 내조,현대 · 기아차를 세계 5위 규모로 키워내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다. 자녀들에게 수시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들려주며 '겸손'을 강조했다고 한다.

북한에 고향을 둔 평범한 실향민 집안의 셋째딸로 태어난 이 여사는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1남3녀를 길러냈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현대건설 비서실에서 근무했고,당시 정 회장과 열애 끝에 결혼했다.

정 회장과 고인의 금슬은 유별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회장이 사석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결혼했을 때"라고 스스럼없이 얘기했을 정도다.

이 여사는 손위 동서인 이양자씨가 1991년 암으로 세상을 뜬 후 범 현대가의 맏며느리 역할을 해왔다. 서울 한남동 자택에 살던 그는 정주영 명예회장 생전에 매일 오전 3시30분 시댁인 청운동으로 달려가 아침 식사를 손수 준비하곤 했다. 정주영 회장이 오전 5시에 온 식구와 같이 밥을 먹으며 근면과 검소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변 여사가 1989년부터 18년간 병원 신세를 졌기 때문에 식구가 많기로 유명한 현대가의 아침 준비는 며느리들의 몫이었다. 이 여사는 병석에 누운 시어머니를 돌보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2006년 조카인 정대선 현대BS&C 사장이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와 결혼할 때 상견례는 물론 결혼식장에서 손수 하객을 맞았다.

가정과 가문을 돌보는 일에 50여년 가까운 세월을 바친 이 여사가 그나마 외부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03년이다. 당시 그룹의 레저 분야 계열사인 해비치리조트 이사직을 맡은 데 이어 2005년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현재 해비치리조트 지분 16%를 가진 대주주 및 고문으로 돼 있다.

외부 활동을 꺼렸지만 외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39)과 관련한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아들 사랑이 각별했다. 작년 1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현대차 제네시스 신차 발표회장에서 당시 기아차 사장을 맡고 있던 정 부회장과 나란히 앉았고,기아차 디자인 경영의 첫 결실인 모하비 발표회에서도 아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행사장 모퉁이에 앉아 있던 이 여사에게 정 부회장이 "어머니,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넨 뒤에야 그룹 임직원들은 이 여사를 알아차렸다. 작년 10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모터쇼에서는 며느리 정지선씨와 함께 참석해 정 부회장의 영어 연설을 경청하고 격려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