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를 타고 가던 중년 자매가 '베트남 처녀 중매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보았다. 여동생이 "베트남 처녀하고 말이 안통해서 어찌 살까?"하고 걱정하자 언니가 대뜸 "이것아,너는 아직도 신랑이랑 말이 통하냐?"라고 언성을 높였다. 중년부부의 불통(不通)을 빗댄 우스갯말이지만 우리시대 곳곳에서 발견되는 '닫힌 문'을 풍자한 듯하다.

새 정부 들어 조각,촛불집회,용산참사,언론법,남북갈등,정운찬 총리 임명동의안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상호 불통이 화두였다.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권만 살펴봐도 여당이 100% 찬성하면 야당이 100% 반대하고,야당이 전원 반대하면 여당의원 모두가 찬성하는 극단적 불통이 고착되기 시작했다. 북한이 투표 100% 찬성률을 자랑하면 비민주적이고 독재체제이며 '닫힌 세상'이라고 힐난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융통성 없는 '닫힌 가슴'에 대해선 반성할 기미가 없다.

세상에는 양과 음이 있고 동과 서가 있으며,뜨거운 것이 있으면 차가운 것이 있어야 하고,내가 있으려면 네가 있어야 하며,햇볕이 뜨거울수록 그늘이 짙은 법이다. 그것을 일컬어 조화라고 한다. 진보가 빛나려면 보수가 있어야 하고,보수가 제 역할을 하려면 진보가 존재해야 하는데 혹여 내 편만 멀쩡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는가. 야당이 당당하려면 여당이 정정해야 하고,여당이 나라를 이끌어 가려면 야당의 견제가 필수적인데 혹여 내 주장만 옳다고 우기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평상시에도 내편과 네편을 가르고 내편은 아군이요 네편은 적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지연,학연,혈연 따위에 스스로 옥맺히지 않았는가.

조금 지난 얘기지만 과거에 구독하던 신문을 다른 신문으로 바꾸려면 참 애를 먹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여성 교수가 이사를 했는데 그 집에 그동안 배달되던 신문이 자신이 보는 신문과 달랐다. 그는 평소 구독하던 신문으로 바꾸기 위해 대문에 '◆◆신문 사절'이라 써 붙여도 보고 전화를 걸거나 배달하는 사람에게 사정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배달원에게 말했다. "신문을 받을 때마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 배달원은 왜냐고 물었다. "나는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라 신문을 보면 더 답답하고 서럽기만 합니다. " 그러자 배달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날부터 신문배달이 중지됐다. 그 교수는 자신을 내려놓는 순간 상대방과 소통된다는 걸 알았기에 그런 재치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소통하려면 원하는 쪽에서 먼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으로 우리나라는 사랑,용서,베풂으로 출렁거리게 됐다. 종파와 지역과 남녀노소와 이념을 뛰어넘어 국민들의 가슴을 흔들었던 것은 바로 낮춤이었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포용,자기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 " 추기경의 이 말씀은 스스로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와 동시에 내려놓을수록 소통하게 된다는 교훈을 남긴 것 같다.

같은 종(種)에 속하는 한 개체가 다른 개체로부터 반응을 얻기 위해서 페로몬을 분비한다고 한다. 개미,곤충,척추동물들이 페로몬을 분비해 여러 가지 정보를 교환하기에 사회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물며 인간사회에 불통이 만연한다면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허준의 <동의보감>에 '통즉불통(通卽不痛)하고 불통즉통(不通卽痛)이라' 했다.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못하면 아프다'는 표현이 어디 육신만의 문제이겠는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의 가슴앓이인 것 같아 가슴이 시리다.

김홍신 <소설가·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