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 턴어라운드] 스티븐 로치 "세계경제 회복 중이지만 더블딥 가능성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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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 亞 회장 인터뷰
"사상 유례 없는 유동성 공급에 힘입어 세계 경제가 예상보다 빨리 저점을 통과해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규모의 부양책에 크게 의존한 결과여서 위기의 불씨가 사라졌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글로벌 리밸런싱'(미국의 과잉 소비 해소와 아시아의 내수 확대)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부상했습니다. "
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사진)은 한국경제신문 창간 45주년을 맞아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세계 경제는 바닥에서 막 벗어나고 있다"며 이같이 진단했다. 하지만 '국제 자본시장의 영원한 신중론자'라는 평가답게 그는 "진행 중인 경기 논쟁의 핵심을 '바닥 시점 찾기' 대신 '회복의 질과 연속성'에 맞춰야 한다"며 위기는 아직 '진행형'이라는 지적을 잊지 않았다.
◆선진국 경기 회복은 느리고 완만하게
로치 회장은 올해 초만 해도 자산 버블 붕괴로 야기된 글로벌 경기의 하강 국면이 적어도 내년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지만,지금은 시각이 달라졌다. 그는 "미국과 중국 등의 대규모 경기부양책 덕분에 이제 막 바닥에서 탈출하고 있다"며 회복론에 가세했다.
다만 근본적인 수요 회복이 아닌 미국의 '자동차 구매 지원책'과 같은 일시적인 소비 진작 정책 등이 경기 회복을 견인하고 있어 세계 경제는 여전히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위기가 금융시장을 벗어나 전 세계 실물경제로 옮겨간 데다 대량 소비로 글로벌 경제 성장에 기여해 온 미국 가계들이 향후 수년 동안은 소비 긴축에 매진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 막 진입한 탓에 급속한 'V'자 반등은 어렵다는 설명이다.
로치 회장은 "미국의 개인 저축률이 지난 8월 말 현재 겨우 3% 수준으로 올라서는 등 가계 부채율이 아직 뚜렷하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며 "미국인들이 신용에 기반한 과잉 소비에 젖어 있던 과거의 소비패턴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71%에 달하는 상황에서 소비 위축은 미국 경제의 회복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고,결국은 세계 경제의 성장마저 제한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경기 회복은 느리고 완만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다. 로치 회장은 "주요 선진국들은 앞으로 수년 동안 연평균 1.5~2%의 낮은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경기가 다시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는 기준인 최저 성장률(1.0%)에 근접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위기 이후에는 늘상 예기치 못한 악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선진국 경제가 회복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더블 딥'의 수렁으로 빠질 확률이 33%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아직 면역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추가적인 충격이 전해질 경우 세계 경제는 다시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시아 시대' 기대 높지만 시기상조
로치 회장은 미국을 진원지로 한 이번 위기를 통해 '글로벌 리밸런싱'의 시급성과 아시아의 성장잠재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세계 경제 시스템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인 미국의 과도한 소비와 아시아 국가들의 높은 수출의존도를 확인했다는 지적이다. 그는 "글로벌 위기는 이 같은 불균형이 현실화한 결과로 아시아가 성장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분명한 암시"라고 전했다.
아시아는 금융위기 이후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수출 비중이 여전히 높아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건전한 소비시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상치 못한 수요 감소가 발생하면 성장률 둔화와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는 "금융위기 이후 가장 긴급한 과제로 떠오른 '글로벌 리밸런싱'을 위해 아시아 국가들은 과도한 대외 의존도를 줄이고 내수시장 증진을 통해 보다 균형 잡힌 성장 모델을 갖춰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미국을 비롯한 적자국가들의 저축률 확대와 아시아의 내수 소비 촉진이 뒷받침돼야 세계 경제의 새로운 리더십이 구축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로치 회장은 "중국이 이번 위기 국면에서 과도한 고정투자를 촉진하는 인프라 구축 정책을 실시한 것은 오히려 글로벌 경제의 불균형을 야기시키는 것"이라며 아시아가 글로벌 경제를 이끄는 '아시아 시대'(Asia Century) 도래에 대한 기대는 성급하다고 꼬집었다. "아시아의 수출의존도는 2000년대 들어 더 높아졌다. 최근 10년간 가장 역동적이고 빠르게 성장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아시아의 패권은 여전히 불확실하며 '아시아 시대가 임박했다'는 축배를 들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지적이다. 그는 "위기상황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기존 방식으로 회귀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마련이지만 아시아는 자본투자에 과도하게 의지하는 공급 지향적 성장의 틀을 깨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대규모 유동성 공급 '후폭풍' 막아야
로치 회장은 위기 국면을 타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각국 정부의 정책 지원에 대해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규모 유동성 공급이 가져올 후유증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비심리 회복 지연과 높은 실업률로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동성 버블이 꺼질 경우 자산 의존도가 높은 선진국 경제는 또 한번의 충격을 피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 20년 동안 취해온 소비촉진용 '제로금리' 정책의 후유증으로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예로 들었다. 그는 "임시방편으로 무리한 부양책을 동원해 미국이 심각한 경기 침체를 막아내더라도 제때 효과적인 '출구 전략'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일본과 마찬가지로 지속 가능한 회복의 계기를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진국이 자생적인 회복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글로벌 경제도 위기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달러 약세 현상도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진단했다. 그는 "저축률이 낮은 상태에서 미국이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하려면 해외 자본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야 하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져 다시 달러 약세를 불러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로치 회장은 "달러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 외환보유액이 많은 국가들이 자산을 달러로 보유하는 데 대해 의문을 갖게 돼 달러 중심의 세계 금융 시스템에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달러 약세 문제도 글로벌 불균형을 줄여가는 과정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강지연 기자 sere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