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디젤 엔진을 연구하던 현대자동차 정승갑 차장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번뜩였다. 'S엔진(베라크루즈,모하비에 탑재된 3.0ℓ 디젤 엔진)을 소형 선박용으로 개조해보면 어떨까?' 수요도 괜찮을 듯 보였다. 어민들은 값 비싸고,부품을 구하려면 한 달씩 걸리는 수입 제품을 쓰느라 고충이 컸다. 유럽 소형 보트시장을 뚫으면 수출길도 열릴 듯했다. 정 차장은 곧바로 동료 3명과 함께 그해 5월 사내 벤처를 신청,2년5개월 만인 13일 현대씨즈올이란 선박 엔진회사의 대표 이사직에 올랐다. 사내 벤처 6호다.

현대 · 기아차가 2000년 시작한 사내 벤처 제도가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다. 이들은 덩치 큰 대기업으로선 쉽게 움직이기 어려운 틈새 영역을 개척하는 선봉대 역할을,때론 수입에 의존하던 자동차 부품을 국산화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글로벌 5위권에 오른 현대 · 기아차의 저력엔 '아이디어 뱅크'도 한 몫을 했다.

◆사내 벤처 대기업 가운데 유일

2000년은 벤처 열풍의 해였다. 현대차를 비롯해 삼성,SK,포스코 등 굴지의 대기업들이 사내 벤처를 시작했다. 삼성SDS에서 분사한 네이버가 교과서였다. 9년이 흐른 지금,사내 벤처 제도는 현대 · 기아차를 빼놓고 자취를 감췄다. 김억한 현대 · 기아차 벤처사업개발팀 부장은 "처음엔 게임 등 신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다"며 "자동차라는 큰 틀에서 개발을 진행하는 것이 낫다고 일찌감치 판단했다"고 말했다. 현대 · 기아차의 사내 벤처 제도는 매년 20여개 팀이 공모하고,지금도 7개팀이 또 다른 벤처 창업을 위해 연구를 진행할 정도로 활발하다.

초기 사내 벤처들은 주로 수입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호 벤처인 HK-Ecar의 차량용 블랙박스,2호 벤처 PLK가 개발한 차선이탈경보장치가 대표적이다. PLK의 제품은 신형 에쿠스에 장착됐다. 사내 벤처가 없었다면 현대차는 지멘스에서 부품을 수입하느라 애를 먹었을 게 뻔하다.

사내 벤처가 개발해 부품 협력업체에 기술을 이전한 사례도 있다. 김 부장은 "DMF(소음과 진동을 저감시키는 변속기 부품)를 국산화해 협력업체에 로열티를 받고 기술을 넘겼다"고 설명했다.

◆잘 키운 사내 벤처 열 계열사 안 부럽다

현대씨즈올은 현대 · 기아차의 사업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대 · 기아차로부터 디젤 엔진을 공급받아 선박용으로 개조하는 사업구조상 모기업도 수익이 짭짤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 현대씨즈올 대표는 "유럽은 고급 SUV와 소형 선박이 5000만원 안팎으로 값이 비슷하다"며 "소형 선박용 엔진에서 현대 · 기아차 제품이 인정받으면 유럽 SUV 시장을 공략하는데도 한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볼보,폭스바겐 역시 자회사를 설립해 선박 엔진 분야에 진출했다. 볼보 자회사는 연 매출이 1조원을 웃돈다.

현대씨즈올은 유럽 및 오세아니아 24개국에서 12개 딜러망을 1차로 확보했고,값비싼 수입산을 대체해 2013년께 연 매출이 8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현대 · 기아차는 사내 벤처를 통해 자동차 서비스 분야로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중고차,정비 등 자동차 애프터 마켓이 주요 타깃이다. 애프터 마켓은 완성차 시장보다 규모가 크지만 영세 사업자들의 반발로 진출이 쉽지 않다.

벤처 4호인 HK-Ucar가 중고차 온 · 오프라인 소매 사업을 벌이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하이브리드카,전기차 등 차세대 자동차용 부품 개발과 관련된 공모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