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겨울,통금을 불과 한 시간여 앞둔 심야.한 젊은이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 신촌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바쁜 걸음만큼이나 어머니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아들이 연상의 여학생(4학년)을 쫓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여학생하고 같이 있던 아들을 찾아내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도대체 너 어떡하려고 그러느냐"는 꾸지람이 매서운 칼바람에 흩어져 나갔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1994년 LG전자 심사부장실.부하 직원들을 모아놓고 "도대체 회사가 어떻게 되려고 이 모양이냐.이대론 정말 안 된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일개 부장 신분으로 회사 최고위층의 의사결정에 정면으로 맞섰으니 뒤탈이 없을 수 없었다. 사표를 낼 각오를 하고 있던 그에게 떨어진 명령은 미국법인 근무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추방당한 꼴이었지만 미국에서도 본사 경영에 대한 성토를 멈추지 않았다.

#"내 사업은 안 한다"

한때는 피가 끓고 가슴을 저미는 순간이었으되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52)의 젊은 날들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LG에서 탄탄대로를 달려온 인물 치고는 뜻밖의 스토리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권 사장의 이력은 무척 화려하다. 32세에 LG전자 최연소 부장,45세에 LG전자 CFO(재무담당 최고경영자)를 거쳐 50세가 되기도 전인 2006년에 사장이 됐다. 2007년부터 LG디스플레이 사령탑을 맡고 나서는 회사를 세계 최정상급으로 키웠다. 그의 부친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보안사령관을 지냈던 군부의 실세,장인은 한때 재계의 실력자로 군림했던 국제상사 양정모 회장(2009년 3월 별세)이었다.

권 사장은 하지만 회사 생활에 "장인의 후광은 전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동갑내기 부인 양정례씨와 1977년 그룹미팅에서 만나 6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지만 세칭 '처가 덕'을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손위 동서들이 그룹 경영에 참여할 것을 권했던 때도 있지만 자신은 평생 회사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권 사장의 대답은 엉뚱했다. "내가 점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이라는 단서를 단 뒤에 "여기저기 헤프게 퍼주는 성격이라서 사업을 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외상 주면 끝내 떼이고야 말 팔자라는 것.

#우연이냐 순응이냐

LG전자 CFO 시절,엄격하고 혹독하기로 유명했던 권 사장이 점쟁이로부터 이런 '진단'을 받았다는 것,그리고 철석같이 그것을 믿고 있는 것도 다소 의외였다. 말 그대로 기업 엘리트의 전형인 권 사장도 알고 보면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는 투박한 삶의 '코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왜 LG전자에 입사했느냐는 질문에도 여느 CEO(최고경영자)들이 설명하는 '꿈'이나 '야망'같은 단어들은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게 전부다.

그래도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청춘의 방황기를 양파 껍질 벗기듯이 하나씩 물어봤더니 이랬다. "제가 워낙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장충동 족발집이나 경희대 인근 술집에서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냈지요. 그렇게 수업을 빼먹다보니 대학 4학년 때 교련 학점에서 F를 받았습니다. 징집 규정상 그대로 졸업하면 군에 입대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KAIST 대학원(산업공학과)에 갔어요. 당시 KAIST엔 군 면제 프로그램이 있었거든요. "

LG전자에 입사를 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우연의 연속이었다. "대학 졸업반 때 어느 고등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요즘 말로 과외 선생을 한 거죠.그런데 그 학생의 부친이 당시 금성사(옛 LG전자)의 임원이었어요. 어느 날 함께 차를 마시는데 '졸업하면 우리 회사로 와라.면접 없이 바로 뽑아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바로 입사원서를 냈지요,뭐."

"무엇 하나 제대로 계획하신 게 없군요"라는 기자의 핀잔에 권 사장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흐름을 탄 겁니다"며 웃었다.

#일찌감치 배양한 글로벌 역량

이렇게 헐렁하게 젊은 날을 보냈던 권 사장도 입사(1979년) 후에는 마음을 다잡았다. 놀 만큼 놀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만큼 스스로 기특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첫 부서는 심사부.시장조사와 신사업 발굴 등의 업무를 하는,요즘 용어로는 기획실이었다.

첫 과제로 컬러TV 수요 예측을 맡아 성공적으로 해냈더니 본부장의 과분한(?) 칭찬과 함께 가스레인지 수요 예측 업무가 추가로 맡겨졌다고 한다. "일을 잘 한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시작하면 몰입을 하는 것은 맞습니다. "

그는 평생의 은인으로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둘째 동생 구자학 아워홈 회장(당시 금성사 사장)을 첫 손에 꼽는다. 1988년 과장 2년차 때 해외투자 업무를 맡아 홍콩에서 바이어를 만나고 있는데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해외투자실을 새로 만드는데,부장을 맡으라는 것.

당시 사내에선 파격적인 인사라며 논란이 많았지만 권 사장의 업무능력을 높이 평가한 구자학 회장은 뜻을 꺾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의 글로벌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토대였고,최고의 기회가 됐다. 4~5년간 해외업무를 맡아 공장을 짓느라 동분서주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에너지 뱀파이어는 경멸 대상"

"이런 기회가 없었더라면 1999년 초 LG그룹의 운명을 바꿨던 필립스사와의 LCD(액정표시장치)부문 전략적 제휴 협상에도 참여하지 못했을 겁니다. 외환위기 여파가 최고조에 달했던 터라 해외자본을 유치하는 데 목을 매고 있던 시절이었죠."

당시 LG전자 재경팀장을 맡고 있던 권 사장은 서울 여의도의 LG 트윈타워 테이블에 마주앉은 필립스 측에 현금출자액수로 75억달러를 요구했다. 애초에 필립스가 제시했던 금액(5억달러)에 70억달러를 얹어 무려 15배를 부른 것이다. 필립스의 CFO이자 협상단장인 프란츠 스파가렌은 격앙된 목소리로 항의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 뒤로 수차례 협상 결렬을 선언하는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권 사장은 샌프란시스코로,암스테르담으로 끊임없이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렇게 가슴을 졸이며 필립스로부터 얻어낸 금액은 40억달러.당초 제시했던 75억달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다급했던 LG 내부적으로는 최선의 성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열정적으로 일했던 것 같아요. 제 자신에게 기특하다고 칭찬해주고 싶어요. "

그러고 보니 권 사장은 자신에게 '기특'이라는 단어를 무척 자주 쓴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스스로 만족스럽냐고 물었더니 빙그레 웃는다.

어떤 부하를 가장 싫어하느냐는 질문에 '에너지 뱀파이어(energy vampire)'라고 단언했다. 자신의 재능만 믿고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실력이 없는데도 있는 척하는 사람들은 다른 동료들의 에너지까지 앗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우리 회사엔 뱀파이어가 한 명도 없다고 자부합니다. 결코 제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에요. "

따지고 보면 권 사장은 대기업 CEO로는 보기 드물게 자유롭게 생각하고 활달하게 움직이는 사람이다. 어떤 의미에선 자유분방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인물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묻는 것이 문득 부질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터뷰 말미에 기어이 그 상투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뭐 가능하면 60세까지 회사 다니는 거죠.그 밖에 딴 거는 생각 안 합니다. "

파주=조일훈/송형석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