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제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허브 등 선진국이 이미 장악한 시장으로 옮겨가려 하기보다 부품 · 소재산업 등 중소기업과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서 중국과 맞서 싸울 생각을 해야 합니다. "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46)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수차 강조했다. 그는 또 "이번 금융위기는 그동안 우리가 잘못 풀어놓은 사모펀드 등 관련 규제를 다시 정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한국의 기간산업을 흔들 수 있는 분야에 외국 단기자본이 지나치게 개입하지 못하도록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책과 서류가 가득한 사무실에서 기자가 방문하기 직전까지도 각종 통계 · 발표자료와 씨름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등 개발도상국으로 강연을 다니는 일이 많다고 귀띔했다.

▼지난 4월과 6월 인터뷰 등을 통해 경기회복이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했다. 그 뒤로 경기가 일부 좋아지는 지표들이 나왔는데.

"속단하기 어렵다. 경기회복 신호라는 것들을 잘 보면 작년 말부터 상황이 워낙 나빴기 때문에 지표상으로 조금 좋아진 것 뿐이다.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아직도 대부분 지표가 10~20%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경우 환율 효과 등으로 수출이 빨리 회복됐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난해 동기와 비슷한 수준일 뿐이다. 게다가 미국과 EU(유럽연합) 실업률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미국 영국의 임대용 사무실 공실률도 상승 중이다. 실업률 증가 추세가 지속되고 있어 주택담보대출,신용카드 등 곳곳에서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또 중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을 한꺼번에 많이 쏟아부었는데 이 과정에서 부실대출이 발생하는 등 거품 조짐이 있다. 환율도 문제다. 달러 약세가 지속되면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 체제가 흔들리고,미국의 소비가 감소하면 중국의 수출시장이 줄어들게 된다. 파운드화 약세도 영국발 금융대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영국이 파운드화를 포기하고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에 가입하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인 영국 금융시장은 큰 충격을 받고 이는 다시 달러패권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위기를 통한 질서재편'이라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세계경제가 방향성을 상실하는 불안한 상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 "

▼이번 금융위기가 발생한 원인은 뭔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불거졌던 IT(정보기술) 버블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은 게 근본 원인이다. IT 버블이 꺼지며 경제 위기가 오자 미국에서 앨런 그린스펀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9 · 11 테러사태를 계기로 재정지출을 대폭 늘렸고,그게 부동산으로 옮겨가 지금의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일반적인 경기순환과는 다르다.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 규모가 위축된 적이 없는데 올해 처음으로 줄었다. 미국도 70년대 이후 실업률이 10%에 육박한 사례가 없는데 지금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

▼한국에서는 미리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아직 시기상조다. 최근 금리 인상을 단행하는 등 출구전략을 마련하는 호주의 경우는 지표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른 나라는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다. 정부는 단기적으로 재정 팽창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 다만 향후 더 많은 열매를 딸 수 있는 분야에 돈이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엉터리 부문에 투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설업 등 당장의 고용창출 효과에 너무 집착하기 보다 한국 정부가 늘 얘기하는 녹색성장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술 패러다임이 변하는 분야에 앞서 투자해야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 당장의 재정적자 규모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시스템을 어떻게 잘 고쳐서 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

▼금융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파생상품도 의약품처럼 허가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은행 자기자본비율만 높이는 정도면 충분하다는 사람도 있다. 적절한 규제 수위는 그 중간에 있을 것이다. 금융회사는 혼자 문 닫으면 되는 식당이 아니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드러난 사실은 금융가 사람들도,매니저들도 전반적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금융시장은 미국의 1~2% 수준에 불과하다.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미국에서 잘못되면 큰 타격이 있다. 그러니 무조건 열어놓고 돈이 들어오도록 하기보다 어떤 경우에도 기간산업을 보호할 수 있도록 적절한 규제를 해야 한다. 이번 금융위기는 그런 규제를 가하기에 최적의 시기다. 명분이 있다. 외국 자본이 빠져나갈까봐 걱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들어온 돈이 좋은 곳에 쓰이도록 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사모펀드가 기간산업 분야에서 일정 지분 이상의 대주주가 되려면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밝히라고 요구하거나,주식을 취득할 경우 최소 보유기간을 설정하는 식으로 규제를 재구축해야 한다. 미국도 중국이 항구를 산다고 하면 못하게 하는 게 현실이다. "

▼한국은 미국, EU,인도 등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양자간 FTA를 늘려가고 있다. 평소 FTA를 비판해온 걸로 안다.

"선진국과 FTA를 하면 우리에게 손해고 후진국과 하면 이익이라는 생각엔 변함없다. 하지만 찬반을 떠나서 FTA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한국 경제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징후다. 우리가 그간 수출을 잘 했던 것이 FTA 덕분이었나. 중국이 지금 수출을 잘 하는 것이 FTA 때문인가. 실제 선진국의 관세장벽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저가 상품인 티셔츠 등과 달리 자동차 등은 몇 퍼센트 수준의 관세율이 소비자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시장을 개척하고,기술을 개발하고,기업가 정신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근본 활력이 약해지니까 관세 등 비핵심적인 부분이 자꾸 이슈가 되는 것이다. "

▼활력을 다시 불어넣을 방법은 없나.

"한국의 성장률이 그렇게 낮아질 단계까지 가지 않았다.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생산성이 50~60%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자본시장 개방과 대기업을 때려잡는 정책 때문에 지금은 4% 성장률도 높아 보이는 상태가 됐다. 기업들이 투자를 잘 하지 않고 소극적이다. 온 나라가 소극적이다. 중국이 쫓아온다고 하니까 금융업 등으로 옮겨가려고,도망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 이미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 잘 왔다며 지분을 내줄 것인가. 중국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포르투갈과 슬로베니아 수준 정도다. 그리스만 해도 국민소득이 2만4000달러에 이르고,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핵심 국가는 3만달러 수준이다. 결국은 기술력이다. 스위스 같은 나라가 관광산업이나 하는 것 같은데 왜 국민소득이 높은가. 소비자들이 잘 모르는 부품 · 소재산업에 우수한 중소기업들이 포진해있는 덕분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페루 수준으로 국민소득이 낮아진 독일이 10년 만에 원래 수준을 되찾은 데는 기술력을 가진 인재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을 평가하면.

"처음에 실용주의를 제시했을 때 금융은 상당히 자유화된 반면 부동산은 강하게 규제하는 등 경제정책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혼합돼 있는 싱가포르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당초 계획한 것을 마음대로 펴지 못하는 터부(금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경제사를 되짚어 보면 좌파의 정책과 우파의 정책이라는 것은 명확히 구분돼 있지 않다. 이 정책은 우파,저 정책은 좌파라는 논리를 벗어나야 한다. "

케임브리지(영국)=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장하준 교수는… 기간산업 보호 육성·유치경제론 분야 명성

장하준 교수는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완전한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보다 기간산업의 보호 · 육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유치경제론 분야의 세계적 경제학자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에서 석 ·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90년부터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재식 전 산자부장관의 아들로 한국의 대표적인 수재 명문가 집안으로 꼽힌다. 동생인 장하석씨는 런던대 과학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사촌으론 장하성 고려대 교수와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있다.

영국에서 공부한 지 4년 만인 27세에 교수로 임용됐다.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이어서 주목을 받았었다. 2003년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을,2005년에 경제학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에프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의 경제성장은 자유시장경제 도입의 효과라기보다 국가의 산업발전 수준에 따른 단계적 규제와 통제,보호에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를 '정신적 스승'으로 칭하곤 한다. 주요 저서는 △사다리 걷어차기(2004) △개혁의 덫(2004) △쾌도난마 한국경제(2005 · 공저) △국가의 역할(2006)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2008) 등이 있다.